윤인호 감독의 ‘아홉살 인생’은 남녀 초등학생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로맨틱 멜로다.

대개의 한국영화 출연진 리스트에선 ‘아역’ 배우들이 따로 묶이지만, 이 영화에선 14명의 초등학생 배우들이 첫머리에 놓인다. 어머니 역의 정선경 같은 어른 배우가 오히려 ‘특별출연’이다.

원작이 된 위기철의 베스트셀러 소설 ‘아홉살 인생’은 달동네에 사는 소외된 인간 군상들의 가슴 아릿한 이야기들을 소년의 눈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영화 ‘아홉살 인생’은 원작의 뼈대만 빌려올 뿐, 영화의 초점은 한 남학생과 두 여학생 사이의 삼각관계(?)쪽에 맞춘다.

남주인공은 경상도 어느 산동네 초등학교 3학년생인 백여민(김석). 그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짱’이고, 가난한 친구와 도시락을 나눠먹는 착한 학생이며, 시각장애인인 어머니의 믿음직한 아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에서 전학온 도도하고 예쁜 소녀 장우림(이세영)이 이 사내 아이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한다. 소년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소동들이 이어지고, 소년은 그때까지 몰랐던 시련도 맛본다. 이 소년을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소녀 오금복(나아현)도 질투의 괴로움을 알게 된다.

‘아홉살 인생’ 속 소년 소녀들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수채화빛 고운 사랑은 아니다.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솔직 활달의 투명한 사랑이다. 한 남자 아이를 사이에 놓은 두 소녀는 훌쩍이며 가슴 아파하는 대신,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고 코피가 터지도록 맞붙는다. 이들의 풋사랑엔 사랑에 처음 눈뜬 이의 열병, 질투심,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 등 연애 감정들의 다양한 측면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각색을 맡은 극작가 이만희가 빚어낸 대사들은 그의 말솜씨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넌 뭐가 겁나니? 소문이 겁나니? 난 눈치 안 보고 살아!”와 같은 어른스런 대사들을 어린 배우들이 능청맞게 소화한다.

‘아홉살 인생’의 배경엔 70년대의 한국 풍경이 있다. 토끼를 기르던 학교 뒷마당, 양은 도시락, 최상급의 수식어였던 ‘미제’라는 두 글자, 미국 잉여 농산물로 만들어 나눠주던 거친 옥수수빵, 학급에서 돈이 분실되면 꼭 모두들 눈을 감게 했던 선생님…. 어른들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 재미와 감동을 안기는 스토리와 맞물리면서 향수를 자극한다.

‘아홉살 인생’은 어린이들이 삶과 사랑의 쓴맛 단맛에 눈떠가는 아름다운 성장영화이면서, 따뜻한 애정으로 반추해낸 한 시대의 풍경화다. 그래서 극장 영화로서의 짜릿함이 떨어지는 잔잔한 스토리인데도 눈길을 붙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