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만화 주인공 ‘도날드 닭’으로 유명한 만화가 이우일(35)씨가 최근 ‘노빈손의 무인도 완전정복’(뜨인돌 출판사)이란 제목의 첫 장편 만화를 발표했다. 이 만화에서 노빈손이 점령한 것은 무인도만이 아니다. 교양 과학서인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를 5년 만에 만화로 다시 만든 이번 작품을 통해 ‘노빈손’은 “삽화는 글의 종(從)일 뿐”이란 통념을 깨고 책의 주인이 됐다.
이씨는 “책이 13권짜리 시리즈로 이어지고, 만화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며 캐릭터의 힘과 가능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노빈손은 1999년 시작된 ‘로빈슨…’ 시리즈의 삽화를 통해 등장했다. 머리카락도 몇 올 없는 데다 표정이나 행동이 기발한 노빈손은 2000년대 초 엽기 바람을 타고 인기 캐릭터가 됐다. 처음엔 과학 지식이라는 쓴 약을 감싸는 당의정으로 시작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시리즈의 글과 삽화는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리즈에서 집필자는 7명이 거쳐 갔지만, 삽화가인 이씨만은 터줏대감처럼 남아 ‘캐릭터의 힘’을 보여줬다.
노빈손은 한술 더 떠 책의 독자층까지 바꿨다. 당초 고교생 이상 대학생을 대상으로 기획됐지만, 귀엽고도 엽기적인 노빈손 캐릭터가 의외로 초등학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출판사는 시리즈를 중학생과 초등학교 고학년도 읽을 수 있도록 수정했다. 이씨는 “얼마 전 사인회를 열었는데, 초등학생 독자가 ‘경기도에서 왔다’며 시리즈 13권을 모두 가져와 사인해 줄 것을 요구하더라”라고 말했다. 무표정하고 갸름했던 노빈손의 얼굴이 지금처럼 수다로 두꺼워진 입술을 가진, 동글동글한 형태로 바뀐 것도 초등학생 독자들의 기호에 맞춘 것이다.
이씨는 캐릭터 만들기 전문가다. 남들은 평생 하나도 히트하기 어렵다는데 그는 노빈손, ‘도날드 닭’을 빚어냈을 뿐 아니라 지난해 사랑에 관한 명언과 문학작품의 달콤한 인용문을 만화 그림책으로 각색한 ‘러브북’에서 발그레한 볼을 가진 토끼 ‘버니’를 창조했다. 노빈손 만화에도 무명 오리가 등장한다. 이씨는 “이 오리도 기회가 되면 과거의 도날드 닭처럼 유명해질지 모른다”면서도 “특정 캐릭터를 작가가 의식적으로 띄워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그냥 선보이고 반응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노빈손은 원래 이씨의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던 단역 출신. 그는 “다른 잡지들에 이미 등장했던 캐릭터였는데 당시에는 이름도 없었다”고 말했다. 시리즈 누적 판매부수가 100만부에 달하며 노빈손은 연예인처럼 유명세도 치렀다. 다른 작품에 등장시키면 항의하는 독자들 때문에 노빈손은 명성을 얻는 대신 활동무대가 이 시리즈로 제한됐다. 머리카락 수까지 세는 노빈손 팬들은 “머리카락이 왜 세 올로 줄었다 다섯 올로 늘었다 오락가락하느냐”고 ‘작가의 무성의’를 호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는 다음 달쯤 새로운 만화 캐릭터를 선보인다. 그리스 신화를 교양 만화로 제작하면서 호메로스를 이야기꾼으로 등장시킬 계획이다. 그는 “보통은 캐릭터가 하나이지만 이번에는 소년 호메로스부터 청년, 노년의 호메로스까지 다 만드는 새로운 실험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