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고대사다. 학교 교육은 물론 설화와 이야기, 고전 등을 통해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료가 부족하고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적합한 것도 매력을 끄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전문 학자들은 바로 그 사료 부족으로 연구와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가 펴낸 ‘우리 고대사의 성문을 열다-최광식의 역사탐험’(한길사)은 문헌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밝혀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여기서 그는 신화·제의(祭儀)·민속 등 문자 이외의 자료를 이용하여 수천년 전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생각과 행태를 밝혀보려고 시도했다. 최 교수는 지난 1990년 ‘한국 고대의 제의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랫동안 이 분야에 몰두해 왔다.
“고대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사유 체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화나 제의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엄격한 논증을 요구하는 논문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써 보았습니다.”
최광식 교수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주장을 편다. 예를 들어 단군은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단군 신화에는 단군의 성(性)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어디서나 최초의 신은 여신(女神)이었고 단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단군은 나중에 산신(山神)이 되는데, 고대 사회의 산신은 대개 여성이었다. 그러면 왜 ‘단군 할아버지’가 됐을까? 최 교수는 “중세에 들어와 가부장(家父長) 사회가 확립되면서 단군이 남성으로 인식됐고,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남성성(男性性)이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이런 새로운 해석은 전사(戰士) 집단으로 이해되는 화랑을 종교 집단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화랑과 그 전신인 원화(源花)를 고유 신앙을 따르는 제사 집단으로 보는 관점은 신라사를 이제까지와 다르게 해석하게 만든다.
즉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침략했을 때 포석정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 김유신이 천관녀와 갈라선 것은 불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신궁(神宮)의 여사제(女司祭)인 천관녀의 지위가 몰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광식 교수는 또 이 책에서 비교사적(比較史的)인 고찰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이웃 나라의 고대문명을 통해서 우리의 고대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나 신전이었던 암각화(岩刻畵)의 원류를 몽골 암각화에서 찾고, 우리 쌀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그 원산지인 중국 윈난성 곳곳을 누빈다.
중요 대학에 재직 중인 중진 역사학자가 대중적인 역사서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다. 더구나 최 교수는 고려대 박물관장을 맡고 있고, 지난해 가을부터는 고구려사 공동대책위원회를 이끄는 등 바쁜 사람이다. 무엇이 이 할 일 많은 학자로 하여금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대중을 위한 글을 쓰게 했을까?
“대중이 역사에 대한 수요가 크고 큰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는 활동을 위해서도 그들의 이해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학계가 대중을 방기하는 사이에 잘못된 역사 이해가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최광식 교수는 “이제 학자들은 연구와 함께 그 결과를 저술이나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알리는 데도 더욱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