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두 남자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대결을 펼치고 있는 조인성(왼쪽)과 소지섭. 두 인물의 개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병자(病者)’야. 정상인은 없어”.

작년 말, SBS TV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작가 김기호씨는 첫 촬영을 앞두고, 소지섭·조인성·하지원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 시청률 34.7%를 기록하며, 10·20대 젊은이들 사이에 숱한 ‘발리 러버(Bali Lover)’를 양산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힘은 역설적으로 머리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허점투성이 인물들에서 나온다. 극히 자기중심적인 ‘망나니’ 재벌 2세 정재민과 웃는 낯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출세주의자’ 강인욱이 한 여인을 놓고 ‘격돌’을 벌이는 이 드라마가 젊은이들의 열광적 사랑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2일 오후 서울역 앞 ‘시티타워’ 빌딩 20층에서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촬영에 여념이 없는 ‘발리…’의 두 ‘맞수’를 만났다.

귀여운 악역, 정재민―조인성

청바지에 흰 스니커즈를 신고, 단추 2개를 풀어헤친 검은 남방과 회색 자켓을 걸쳐입은 조인성은 말도, 웃음도 많았다.“재민이요? 막말로 ‘싸가지 없는 녀석’이라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내면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죠.”

그는 “1부와 16부의 재민이를 한번 비교해보라”며 눈을 크게 떴다. 사랑을 모르던 이기주의자가 한 여인을 만나며 변해가는 모습이 눈에 띌 것이라는 말이다. “재민이는 수정이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결혼만은 안 된다’고 하느냐?”고 묻자 “그게 현실”이라고 냉정하게 답한다. 수정에 대해서는, 가난과 돈의 소중함을 알고 생활력도 있는, 현실에서도 끌렸을 여성으로 평가했다. 조인성의 ‘언밸런스’한 패션은 요즘 장안의 화제. 이는 시청자들에게 재민의 다기(多岐)한 캐릭터를 한눈에 이해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일종의 모험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다행스러워요.”

우울한 카리스마, 강인욱―소지섭

촬영현장에서도, 인터뷰 중에도 소지섭은 말이 별로 없었다. “도대체 드라마에서 웃는 장면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제야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러게요. 가끔 비웃는 모습은 있는데, 저도 가물가물해요. 초반에 3~4번쯤 웃었던 것 같기도 한데….

소지섭이 이해하는 인욱은 “가슴 속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 자연스러워 밖으로 내뱉지 않고 안으로 삭이는 게 오히려 편한 인물”이다. 하지만 수정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정서’ 자체가 흔들리는 걸 느낀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한 장면.

“수정이를 많이 좋아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해봤자 비루한 삶이 계속될 것 같으니까 주저하는거죠” 그는 재민·인욱 사이를 ‘탁구공’처럼 왔다갔다하는 수정을 두고, 실제 자신이라면 “다른 남자 좋다고 가는 여자는 절대 붙잡지 않는다”고 했다.

소지섭은 중학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뒤 ‘일당(日當)’으로 생계를 이어온 어머니와 함께 지하 월세방에서 줄곧 자랐다. 극중 인욱 못지 않은 가난을 경험했던 것. “여유있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무표정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체화된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는 “드라마에서 수정과 미희가 7만5000원짜리 밥을 먹으며 ‘이 돈이면 쌀이 2포대에 한달 식비’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을 시리게 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발리…' 결말은 비극?

인터넷 ‘루머(rumor)’에 따르면 ‘발리…’의 세 주인공 재민·인욱·수정은 결말에서 모두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제작진은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비극적 결말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제작진은 조인성이 발리 해변에서 권총자살하는 장면을 찍기도 했지만, 최문석PD는 “비극적 결말을 염두에 두고 찍어본 ‘예비화면’ 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 PD는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이 ‘완성’이 아니라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힌트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