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맨 처음 PC를 판매한 곳으로 가전이 중심이었던 아키하바라의 ‘라디오회관’의 요즘 모습. 가전제품 대신 벽에는 게임 발매 광고가 붙어 있고, 3층은 만화 전문 서점, 위층은 조립식 피규어(정밀 인형)점 등이 들어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전(家電)제품의 거리가 아키하바라(秋葉原)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구시대 인물이다. 아키하바라는 20년 전 가전의 거리에서 IT의 거리로, IT의 거리에서 다시 캐릭터·콘텐츠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역에서 ‘전기거리(電氣街)’라는 팻말을 따라 나오면, ‘라디오 회관’이라는 8층 건물이 있다. 일본에서 가장 처음 PC가 판매된 곳이다. 7~8년 전만 해도 1~2층은 가전제품, 3~4층은 오디오 제품, 5층 이상은 컴퓨터 관련 제품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라디오 회관에는 현재 PC와 관련된 상점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대신 캐릭터와 문화상품이 넘치고 있다. 2층에는 게임 소프트웨어점과 완구점이 늘어서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대형 만화전문 서점이다. 4층부터 위쪽에는 장난감 모델 상품점들이 입주해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아키하바라는 ‘가전(家電)의 거리’였다. 1㎢에 불과한 아키하바라에 전체 일본 가전제품의 약 10%가 몰려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오자, 아키하바라에 몰리던 일본 소비자들은 집 주변 양판점에서 할인해 파는 가전제품을 사기 시작했다. 가전손님을 빼앗긴 아키하바라는 컴퓨터 위주의 ‘IT 거리’로 천천히 변신했다.

그러나 이런 아키하바라는 90년대 말부터는 ‘캐릭터·콘텐츠의 거리’로 또다시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취향의 도시 아키하바라’라는 책으로 유명한 구와사와 디자인 연구소의 모리카와 가이치로(森川嘉一郞) 특임교수(건축전공)는 “1997~1998년 정도부터 게임·애니메이션 관련 업체들이 아키하바라에 다수 등장, 거리 전체의 풍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런 현상은 도쿄 아키하바라 외에도 오사카의 전자상가 역할을 하고 있는 ‘난바’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얘기한다. 첨단 전자제품의 거리라는 말을 듣고 일본을 찾는 외국인들은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들로 가득찬 거리를 보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예전 한때 ‘가전제품의 메카’라고 불렸던 아키하바라를 이제는 ‘오타쿠의 성지’, 또는 ‘모에(萌)의 거리’라고 부른다.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대중문화에 심하게 탐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모에’란 오타쿠 사이에서 통하는 ‘극히 좋아한다’는 뜻의 신조어 내지 은어에 해당하는 말이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탐닉하는 오타쿠들을 위한 캐릭터 상품과 DVD, 게임 소프트웨어 등의 문화상품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번화가는 관청이 만들거나, 혹은 민간이 만들어도 주로 거대자본이 만들어왔지만, 이번에는 개인들의 취향이 도시의 모습을 바꾸는 거대한 작용을 이뤄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또 아키하바라는 개성이 사라진 대량생산의 제조업의 시대를 넘어, 개인의 취향에 맞는 다품종 소량생산 문화산업의 가능성을 웅변한다는 평가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사카이야 다이치 전 경제기획청 장관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산업, 디자인 산업 등이 진짜 선진국만이 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키하바라는 그것을 증명해 주는 ‘예언자적’ 거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도쿄=최흡특파원 po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