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sun.com이 '예일대 로스쿨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예일대 법과대학원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미국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명문으로 미국내 로스쿨 평가에서 줄곧 1위를 달리는 학교입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작년도 졸업한 한국 유학생 정원선씨를 통해 세계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의 교육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씨는 1977년 서울 출생으로, 1996년 서울 이화여자외고를 졸업하고, 1999년 고려대 영문학과(6학기 조기 졸업·학교전체 수석)를 졸업한뒤,유학을 떠났습니다.
정씨는 미국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오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예일 법과대학원 J.D. 과정에 지난 2000년 입학해 지난 여름 졸업했습니다. 재학생들의 배경에 대한 통계를 보면 예일 로스쿨은 외국 출신 학생(international student)에 대해 별로 후하지 않다고 합니다. 정씨가 입학한 해에도 190명 남짓 되는 학생을 통틀어 ‘순수한 외국인’은 정씨와 중국 본토에서 유학온 한 학생 밖에 없었습니다. 정씨는 현재 대학 졸업 뒤 미국의 10대 법률법인 ‘심슨 대처 & 바틀릿’(Simpson Thacher & Bartlett) 뉴욕 본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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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에도 파이가
우리말의 ‘그림의 떡’ 에 해당되는 ‘Pie in the sky’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예일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로스쿨 입학 설명회에 로스쿨 재학생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많은 학생들이 예일 로스쿨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들 했다.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파이를 향해 팔을 뻗쳐 보았자 수확도 없이 괜히 자존심에 상처만 입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예일 로스쿨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갖는 경외심은 예일 로스쿨을 따라다니는 ‘최고’라는 꼬리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일은 미국에서 입학하기 가장 힘든 로스쿨로 알려져 있다. 또 법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진학을 꿈꿔 보는 로스쿨이기도 하다. 로스쿨 입학 시험인 LSAT (Law School Admission Test) 의 평균 점수부터가 미국의 모든 로스쿨을 통틀어 가장 높고, 한편 입학 허가율은 매년 7 % 정도로 그 중 가장 낮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 (U.S. News and World Report)는 매년 학교의 명성, 학생 대 교수 비율, 취업률, 학생들의 학력 수준 등등의 지표를 기준으로 미국 로스쿨의 순위를 산정해 발표한다. 일반적으로 스탠퍼드와 하버드, 그리고 예일을 최고의 법학 명문으로 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 빗대어 이들 세 학교를 ‘트리니티 스쿨’(the Trinity schools)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예일은 이 조사에서 2,3 위를 번갈아 하는 하버드와 스탠퍼드를 제치고 큰 점수 차이로 1위를 고수해 왔다.
유에스 뉴스의 로스쿨 순위 산정 결과는 로스쿨 지원을 앞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바이블인데다 로펌과 법원 등 미국의 각종 법률 기관이 비중 있는 채용 참고 자료로 널리 사용하기 때문에 영향력이 크다. 듀크대 로스쿨의 리처드 슈멀벡(Richard Schmalbeck)교수를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이 이 잡지의 로스쿨 랭킹 기준을 이슈화하고 또 그것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연구 논문까지 발표할 정도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예일 로스쿨의 우수함을 말해주는 객관적인 지표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로스쿨 랭킹 자료를 화두로 삼긴 했지만, 사실 예일 로스쿨을 훌륭한 학교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요소는 워낙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글 몇 줄 적는 것으로는 전부 전하기 힘들 것 같다. 대부분의 로스쿨에선 매년 봄 당해 합격생들을 초대해 학교 설명회를 갖는데, 나도 그 기회를 빌어 여러 학교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 때, 예일에서는 - 아우라 (aura) 라고 하면 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 무엇인가 타 명문 로스쿨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매료되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 해도 정확히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나를 사로잡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내긴 힘든 것처럼, 예일 로스쿨의 미묘한 매력을 활자화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차츰 글을 풀어가면서 이와 같은 예일만의 은근한 매력과 멋스러움까지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無) 성적? 무(無) 석차?
예일 로스쿨은 ‘성적과 석차를 매기지 않는 학교’로 알려져 있고, 이 때문에 호기심을 사곤 한다. 하지만 "성적이 없다" 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으므로 보충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미국의 로스쿨 공부는 어렵고 혹독하다. 이는 명문 로스쿨에서나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학교에서나 다 마찬가지다. 그 때문인지 미국에는 로스쿨을 나온 사람들이 학교에서의 체험을 수기의 형식으로 담아낸 로스쿨 안내서들이 여러 편 나와 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 소설가 스캇 터로우 (Scott Turow) 가 쓴 ‘One L’도 그런 류의 책이다 (스캇 터로우는 우리 나라에서 ‘해리슨 포드의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1990년 영화 Presumed Innocent 의 동명 원작 소설의 저자이기도 하다).
미국 로스쿨 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반 없는 독자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좌절하고 눈물을 삼키고 자학까지 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도전을 하곤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 이들 ‘로스쿨 생존기’를 읽는다면 "야, 이거 참 드라마틱하게 쓰려고 일부러 노력을 많이 기울인 모양이네" 하는 생각을 할 지 모른다. 그런데 ‘경험자’가 보기엔 이 작가들은 그들이 충분히 겪었을 법 한 로스쿨에서의 일상사를 심하게 과장하지 않고 솔직히 써 내려간 것 같다. 그런데도 이들 책에 자연히 사람의 마음과 숨통까지도 쥐었다 놓았다 할 만큼 긴박감 넘치는 사건 전개 구조가 갖추어져 마치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되는 양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로스쿨 생활이 고생스럽긴 한 모양이다.
위에서 얘기한 터로우의 ‘One L’은 무려 300쪽에 육박하는 장편인데, 알고 보면 이 책은 로스쿨의 J.D. (Juris Doctor) 과정 3년 중 첫 해에 겪은 일들만을 다루는 데에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One L’이라는 제목도 ‘로스쿨 1학년생’이라는 의미다. 사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면 1학년 때의 생활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제격이다. 파란만장하기 때문이다. 로스쿨 1년생들은 익숙치 못한 환경에 첫 걸음을 내딛는 만큼 매사에 미숙하므로 필연적으로 좌충우돌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에겐 힘들다고 해도 오랫동안 방황하거나, 느긋하게 몸과 마음을 쉬며 재충전을 한 후 새로 시작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로스쿨 입학 원서 심사 과정에서는 대학에서의 전 학년 평점이 중요하고, 설령 대학 저학년 때의 학점이 좋지 않다고 해도 졸업하기 전까지 성적이 차츰 상승 곡선을 그렸다면 입학 사정위원들이 어여삐 보아 주는 경우도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로스쿨에 입학해 1학년 성적을 망치면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미국의 고용주들은 로스쿨 학생들이 1학년 때 받은 학점을 바탕으로 채용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로스쿨의 1학년 커리큘럼은 우리 나라로 치면 육법(六法)에 해당되는, 법조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기본법 과목으로 짜여져 있는데, 모든 학생들이 1년 동안만은 선택 과목을 들을 수 없고 모두 똑같은 과목을 수강해야 한다. 그러므로 1학년 학점을 주된 평가 기준으로 삼으면 학생들 간의 수평 비교가 비교적 수월해진다.
따라서, 1학년 때의 학업 성취도와 담당 교수에게 남기는 인상은 법대 졸업 이후의 진로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이처럼, 시행착오를 피하기 힘든 처지인데도 처한 상황은 한 번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학생들을 신경줄이 해어지도록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스쿨마다 낙제하거나 자퇴함으로써 1학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 포기 내지 탈락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학생들 간의 과중한 경쟁도 문제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하루 결석한 경우라도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에게 강의 노트를 빌려 달라고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필기한 내용을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학생에게 흔쾌히 빌려 주기란 쉽지 않다. 어떤 학교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몰래 찢어가 다른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곤 한다는 괴담도 종종 들려온다.
예일 로스쿨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로스쿨의 호전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누그러뜨리고 인간적이며 훈훈한 분위기 조성을 돕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였다는 데 있다. 그런 제도들 중 둘만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위에서 밝혔듯 일반적으로 로스쿨에서는 1학년 커리큘럼이 미리 짜여져 있는데, 예일 로스쿨은 필수 과목을 최소화하여, 1학년 1학기에 민사·형사 소송법(Civil and Criminal Procedure), 헌법(Constitutional Law), 계약법(Contracts), 불법행위(Torts)를 듣도록 하고 졸업하기 전까지 학생이 원하는 학기에 형법(Criminal Law) 한 과목만 더 들으면 졸업 요건이 채워지도록 배려하고 있다. 첫 학기 과정은 이들 필수 과목을 중심으로 한눈 팔 여유도 없이 집중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2학기부터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듣고 싶은 강의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고, 여러 가지 특별 활동에 열정을 쏟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바이오 리듬에 맞추어 강의 스케줄을 짤 수도 있으므로 학생들은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로스쿨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첫해가 가장 고생스러워’라는 불평이 예일 로스쿨에서만은 ‘첫학기가 가장 고생스러워’로 바뀌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몸을 낮추어 학생들의 의사를 귀담아 듣고 최대한 존중해 주는 예일이기에 가능한 파격이라 하겠다.
둘째로, 더 나아가 예일 로스쿨은 적응기인 1학년 1학기에 학생들의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수우미양가나 ABCDF 식으로 성적을 매기지 않고 합격/불합격 (credit/fail)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더욱 놀랍게도 예일 로스쿨에서는 학생들의 석차를 매기지 않는데, 이것은 첫 학기에만 해당되는 제도가 아니고 매 학기 적용된다.
1학기에 불합격 학점을 받아 낙제하는 학생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예일 로스쿨에 합격할 만한 학생이라면 결코 불합격을 할 정도로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합격/불합격 제도를 "합격/합격 (credit/credit) 제도" 로 장난기 있게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예일 로스쿨에는 성적이 없다" 는 말이 나오게 된 듯 한데, 첫 학기가 지나면 Honors/Pass/Low Pass/Fail 의 4단계 성적 평가 제도가 엄격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이는 틀린 말이다. 영예 학점인 Honors를 받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일반적으로 강의 내용만 소화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이 학점을 받기 어렵다. 시험이나 페이퍼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칠 수 있어야 비로소 최고 학점 취득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담당 교수의 논문을 찾아 읽거나 더 많은 판례를 수집 공부하는 등 수업 외의 노력을 기울인다.
예일 로스쿨의 학사 제도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물림이 되면서도 계속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열망과 성취욕이 워낙 커 자유를 준다 해도 결코 방종으로 흐르지 않는 데 있다. 사람들은 한 영역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을 쉽게 쉽게 천재라든지 수재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나는 예일 로스쿨에 다니면서 이렇게 수재라 불리는 사람들 뒤에는 어김없이 뼈를 깎는 노력이 숨어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
로스쿨의 강의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학생들의 의견을 이끌어 내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Socratic method) 형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하다 보면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아니면 소홀히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더욱이 예일 로스쿨은 매년 180 명 정도의 학생만 입학시키는 등 소수 정예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연히 교수들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므로 학생들의 실력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예일 로스쿨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나고 야심만만하다. 자연히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갖는 기대도 크기 때문에 수업의 난이도도 높을 수 밖에 없고 과제물도 전부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건성으로 공부해서는 도저히 수업 시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없어 교수의 신임을 잃게 되기 십상이고, 조금만 공부를 게을리 해도 수업 진도를 따라잡기조차 어려워진다. 결정적으로, 공부 9 단인 예일 로스쿨 학생들은 자기 계발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손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석차를 산정하지 않으므로, 학생들 사이에 소모적인 경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강의 노트나 자습서를 아낌없이 나누어 보는 것은 기본이다. 나는 1학년 때 통역 봉사 활동을 하던 중 내가 통역을 맡고 있던 분에게 급한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하루 결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오후에 집에 돌아와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미처 부탁조차 하지 못했는데도 나와 함께 수업을 듣는 동기들 중 두 명이 그 날의 강의 노트를 메일에 첨부해 보내 준 것을 보고 가슴이 따뜻해졌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때까지는 내 공부에 쫓기느라 다른 학생들을 돌아보는 데 소홀한 점이 없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고선 나도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혹시 친한 친구가 결석하지는 않았는지 한번쯤은 꼭 살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