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플갱어'

부산 국제영화제의 중심은 아시아 영화다. 10월 2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지난 한 해 아시아 영화가 거둔 결실이 알차게 담겨 있다. 수많은 출품작 중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까. 조선일보가 추천하는 아시아 화제작 10편.

△도플갱어(일본)

현재 일본 평단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올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하다. 그의 1997년작 ‘큐어’처럼 시작해서 1999년작 ‘카리스마’처럼 끝맺는 이 작품은 ‘분신(分身)’을 뜻하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자아의 분열이란 철학적 주제를 스릴러 형식에 담았다. 슬럼프에 빠진 천재 발명가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지닌 분신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영화엔 일상적 배경 속 무심히 펼쳐지는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폭력·살인 장면들이 섬뜩하게 담겼다.

△침묵의 물(파키스탄)

이슬람 문화권에서 영화는 점점 더 억압적 사회와 종교적 독선에 맞서는 무기가 되어가고 있다. 파키스탄 독립영화 그 자체를 대변하는 여성 감독 사비하 수마르의 이 작품은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인도 대중 영화처럼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한 사회의식을 드러낸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독립한 1947년을 밑그림 삼아 1979년의 시점으로 종교적 갈등이 배태한 한 여인의 비극적 삶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예술은 언제나 진리와 선을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적이다.

△마트루부미-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땅(인도)

인도 감독 마니시 자의 강력한 사회 고발극. 이제 막 시집온 신부를 시아버지와 다섯 아들들로부터 마을 사람들까지 숱한 남자들이 차례로 범하면서 벌어지는 거대한 참극을 냉정히 그렸다. 비슷한 과정을 다뤘던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 우화적으로 인간 본성을 풍자했다면, ‘마트루부미’는 ‘여성이라는 인도의 가장 비천한 계급’의 참혹한 처지를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15년 만에 혼례가 치러진 뒤 벌어지는 그 마을 비극의 뿌리엔 여아 살해라는 악습이 있다.

△불견(대만)

대만 배우 리캉생을 이번엔 감독으로 만난다. ‘애정만세’ ‘하류’를 위시한 감독 차이밍량의 작품 속에서 늘 무표정한 얼굴로 현대 대만인의 황폐한 내면을 담아냈던 그는 연출 데뷔작에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느리고 성긴 화면 속 쓸쓸히 부유하는 도시인들 모습에서 차이밍량의 영향을 드러내는 리캉생은 손자와 헤어진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점점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가치를 그려낸다.

△라스트 신(일본)

감독이 나카타 히데오라고 해서 언제나 ‘링’ 시리즈나 ‘검은 물 밑에서’ 같은 그의 전작 공포영화를 떠올려서는 안된다. ‘라스트 신’은 그가 삶의 회한이 짙게 밴 드라마 연출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음을 증명하는 수작 대중영화다. 한때 멜로 스타로 군림했지만 파트너 배우의 은퇴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어느 배우의 초라한 말년 단역 연기를 뭉클하게 그렸다.

△붉은 황금(이란)

이란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제자 자파르 파나히는 데뷔 초기 키아로스타미 스타일의 ‘하얀 풍선’이나 ‘거울’ 같은 영화를 선보였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이란 사회에 대해 직격탄을 쏘는 ‘서클’ 이후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붉은 황금’에서의 비판 대상은 이란의 극심한 계층갈등이다. 테헤란의 상류층 저택으로 피자 배달을 다니는 청년이 결국 살인을 벌이는 과정에서 겪는 모욕과 좌절이 행동보다는 심리에 눈을 둔 카메라에 오롯이 담겼다.

△안녕, 용문객잔(대만)

45분 만에 첫 대사가 나온다. 이렇다 할 스토리도 없다. 시종 화면은 어둡고 밖은 내내 비가 온다. ‘안녕, 용문객잔’은 그 쓸쓸한 풍경이 모든 것인 영화다. 내일이면 폐쇄될 낡은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추억의 무협영화 걸작 ‘용문객잔’을 상영한다. 몇 명 되지 않는 관객들은 종종 자리를 움직이면서 음식을 먹거나 동성애 파트너를 찾는다. 어떤 이에게는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오래도록 사그라지지 않을 바람 한 자락을 마음에 남길 아름다운 영화.

△선택(한국)

현대판 노예선인 멍텅구리 배에 억류된 선원 이야기를 다뤘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홍기선 감독 신작. 비전향 장기수로 45년간 수감생활을 한 김선명의 시련을 담은 이 사실적 전기 영화에선 감독의 집념 또한 만만찮다. 1995년 광복절 특사로 나오면서 김선명이 한 말에는 분단의 아이러니가 포개져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이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가문 ‘마흐말바프가(家)’의 장녀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재능과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역작.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의 혼돈과 고통을 로드 무비 형식에 또렷하게 담아냈다. 명민한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질곡에 빠진 여성들에게서 아프가니스탄의 모순과 함께 희망까지 발견해낸다. 올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자토이치(일본)

‘소나티네’에서 ‘하나비’까지, 폭력과 명상을 조화시킨 야쿠자 영화로 거장이 된 기타노 다케시 최초의 사극. 맹인 사무라이를 다룬 일본의 인기 TV 시리즈를 영화화했다. 칼끝을 적에게 겨누는 일반적 방식과 달리, 칼날을 자신의 몸쪽으로 향한 채 마치 낫으로 적을 해치우는 듯 전광석화 같은 기타노 다케시 검술이 대단한 재미를 안긴다. 배우들이 총출동해 일본 나막신으로 탭댄스를 추는 마지막 장면의 짜릿한 쾌감은 직접 느껴봐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