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방학기씨

“나는 너에게 무엇이더냐.”

빗 속에서 남자가 말한다. 여자는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남자의 아픈 눈길을 받아내고 있다. 드라마 ‘다모(茶母)’의’ 한 장면. 황보 종사관과 채옥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일합을 겨루며 서로의 기(氣)를 교감한다. “제가 모시는 종사관 나리십니다.”(채옥) “그것 뿐이냐. 그것 뿐이더냐.”(황보 종사관) ‘다모’의 원작자 방학기씨는 이 장면에 대해 “이들은 최고의 무술을 통해, 극한의 섹스를 나누는 셈”이라고 설명한다.

‘다모’는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다. 1일 현재 홈페이지 게시판 글 건수는 70만건을 돌파했다. 다모를 보다가 밤잠을 설치고 제대로 일을 못한다 해서 ‘다모 폐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다모란 조선시대 관가에서 차와 술 시중을 하던 관비를 말한다. 포도청 다모는 규방사건의 수사를 맡는 등 여형사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마침내 ‘다모’는 지난달 26일 방송 10회만에 ‘야인시대’를 누르고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다모’의 줄거리는 무협사극과 멜로를 넘나든다. 역모와 사랑, 칼날을 부딪히는 액션이 얽힌다. 거대한 궁중의 암투 대신 역사의 한 장을 살아간 사람들을 그린다. 채옥(하지원 분)은 자신이 관비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우치고 있는 포도청 다모. 황보윤(이서진 분)은 서얼로 태어난 한을 칼에 품은 좌포청 종사관이다. 역모의 주역 장성백(김민준 분)은 특유의 솔직함으로 채옥의 마음을 끈다. 다모는 이들의 이야기다.

‘다모’는 방학기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다. 큰 줄거리와 핵심 인물은 원작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러나 극중 설정은 원작과 차이가 있다. 성백이 어릴 때 헤어진 채옥의 오빠라는 설정도 원작에는 없다. 이같은 미세한 차이 때문일까. 1995년 펴낸 방학기씨의 원작이 새삼 주목을 끌면서 시중에는 웃돈을 주더라도 귀하기 힘든 형편이 됐다. 정작 방학기씨는 “출판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아직은 별로 (재출간) 생각이 없다”고 느긋하다.

비가 퍼붓던 지난달 27일 서울 홍제동 방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 다모의 인기 비결은 무엇인지.

“월드컵 이후 진정한 민중,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와 맞물린 것 같다. 궁중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통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그저 남자한테 죽어 지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대감들이 딸한테 유산을 적게 주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더니 부인들이 집단으로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원작엔 ‘다모’에 강렬한 페미니즘적 색채를 넣었다. 드라마는 그 부분은 놓친 감이 있다.”

- 시나리오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작진이 놓친 디테일이 아쉽다. 본디 남자의 무술과 여자의 무술은 다르다. 남자의 힘의 근원은 어깨고, 여자는 엉덩이 쪽에서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여자의 무술 중에 손가락을 튕기는 게 있다. 여자가 상대의 눈자위 사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면 덩치 큰 상대도 주저앉아버린다. 포교들이 몸 안에 감추고 다니는 무기만도 참으로 여러 종류가 있는데…. 미국 영화를 보라. 치열한 디테일로 전체 이야기를 꽃처럼 피워 가는 것이다.”

- 채옥 역 하지원씨의 연기를 평가한다면.

“움직임은 대역을 쓸 수 있지만 눈빛은 그럴 수 없다. 심오한 무공이 있으면 눈빛과 액션이 몸에서 풍겨나오게 돼 있다.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살기가 뿜어나오는 것이다. 하지원씨, 잘 하고 있다. 70~80점은 줄 만하다. 그런데 평상시의 몸 움직임이 무술 고수의 분위기가 잘 안 나온다. 드라마 속에서 하지원씨가 오열하는 장면이 있는데, 참 와 닿더라. 연기자 모두 온 몸을 던져 열심히 하고 있다.”

- '다모'의 드라마화를 여러번 거절했다는데 이번에 결심하게 된 이유는 뭔가.

“10년 전부터 사극을 하는 PD들의 제안이 수차례 있었다. 이번에 결심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20여년 전 이화여대 앞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함께 하숙하던 친구가 최근 찾아와 ‘실직해 굶어죽게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방송사에 내 작품을 팔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도와줄 돈은 없고, 도와주고는 싶고. 그래서 그 친구가 중간에서 계약자 역할을 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친구에게 커미션을 줄 수 있었다.”

- 영화광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최근에 본 한국 영화 중에서 ‘와일드 카드’(감독 김유진)를 높이 친다. 대중성을 획득하면서도 잔재미가 있다. 영화를 보면 얼마나 연구한 대본인지 알 수 있다. 자료를 어떻게 배치하는가가 중요하다. 수학으로 따지자면 조합과 순열이다. 어떤 순서로 모으고 줄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수준은 이미 대단하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도그빌’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인간 내면의 추악함과 이중성을 제대로 그리고 있다.”

- 시청률은 의식하는 편인가.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인의 숙명 아니겠느냐. 신경 쓰는 게 당연하다. 연출자와 작가가 얕고, 가볍고 비린내까지 나는 부분도 넣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제작진이 시청률 신경쓰는 것,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 덕분에 컴퓨터 세대에 사극이 먹혔던 것 아니냐. 젊은 세대에 사극이라는 장르와, 우리나라 무협물이 먹혔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다모’는 나름대로 드라마사적인 의미가 있다.”

- 시청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드라마 너머를 봐줬으면 한다. 사랑 이야기 뿐만 아니라 조선조 여인의 화려한 기상, 민중들의 위대함을 봐 달라. 조선시대 여인들은 결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남자들에게 ‘죽어 살지’ 않았다. 형사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남자들에게 ‘동료’로 대접받는 채옥은 조선시대 캐리어우먼 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