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몽헌 회장의 아들(가운데)과 부인 현정은씨가 4일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현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a href="http://photo.chosun.com/html/2003/08/04/200308040002.html">▶포토뉴스 관련사진 보기<

정몽헌(鄭夢憲) 회장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방법을 택했을까. 현재까지 정확한 자살 동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공개된 유서 내용과 현대 관계자들 증언으로 미뤄볼 때, 그는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한 특검과 대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번민과 회한에 휩싸여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 대북송금 수사 과정의 스트레스

정 회장은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 관련 송두환 특검팀에서 지난 5월 30일 첫 조사를 받은 이후 수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다. 특검 조사가 마무리된 직후인 지난 7월 4일부터는 법원에서 대북송금 사건 재판이 시작됐다. 7월 26일과 31일, 8월 2일 등 세 차례에 걸쳐서는 대검 청사로 소환돼 하루 12시간 가량씩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비자금 150억원을 줬는지’ 여부 등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도 받았다. 두달여 사이에 10여차례 특검·법원·검찰에 출석한 셈이다. 특히 자살 직전인 지난 1일 법원의 대북송금 사건 3차 공판에도 참석하는 등 지난달 31일 이후 내리 사흘간 검찰 조사실과 법정을 오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정 회장은 ‘대북송금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실정법의 처벌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변론요지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는 등, 자신이 정력적으로 펼쳐온 대북경협 사업 때문에 법정에까지 선 처지를 안타까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대가 북한에 정부 대신 1억달러를 제공했는지, 150억원 비자금을 전달했는지 여부를 놓고 말이 엇갈리고 있는 박 전 장관이 법정에서 그의 인사를 받지 않는 등 개인적으로 괴로울 법한 장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현대아산 관계자들은 “현대그룹이 공중분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최근 대북송금 문제 등으로 특검 수사를 받게 되자 정 회장이 몹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검찰의 짓궂은 취조에 너무도 견디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 회장 자신도 특검과 관련, 수차례 “괴롭다”고 말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김영완 스캔들’도 자살의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측이 박지원 전 장관에게 준 돈을 김씨가 세탁한 것으로 지목됐고, 일부에선 2000년 3~4월 진행된 정상회담 예비접촉 당시 박 전 장관과 정 회장, 김영완씨가 동행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 대북사업 난항

선대 회장인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그가 주도해온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등 대북사업이 최근 북핵 등으로 벽에 부딪힌 것도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의 하나가 됐을 수 있다. 금강산관광은 도로공사 때문에 육로관광이 중단된데다, 해로관광 역시 북한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을 이유로 지난 4월 일방적으로 중단했다가 최근에야 재개했다.

육로관광은 이르면 9월쯤 재개될 것으로 현대아산측은 기대하고 있지만 북한측은 아직까지 재개 일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대북경협과 관련, 정 회장은 그동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잇따라 해외출장을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좌절감을 느꼈던 것으로 주변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정몽준 의원(다섯번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회장(여섯번째)을 비롯한 가족들이 슬픔에 젖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a href="http://photo.chosun.com/html/2003/08/04/200308040002.html">▶포토뉴스 관련사진 보기<

◆ 검찰 수사에서 뭔가 불거져 나왔을 가능성

특검과 대검은 정 회장이 수사 과정에서 괴로움을 느꼈을 만한 정황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검팀 김종훈(金宗勳) 특검보나 대검 중수부 문효남(文孝男) 수사기획관 모두 “정 회장이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조사 받았다”고 말했다. 특검팀 관계자는 “수사 과정에서 밤샘 조사나 모욕적 언사는 없었다”며 “정신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대검측도 “정식 조사실이 아닌 중수1과장실 옆 빈 사무실에서 대담 형태로 조사를 받았고, 변호사가 수시로 접견하고 식사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의 변호인과 법원 재판부도 “자살까지 할 만한 이상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검찰조사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현대의 대규모 추가 비자금 문제 등이 불거져 나와 이를 추궁받자 큰 충격을 받은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특검팀에서는 불구속 기소에 그쳤지만 검찰에서는 구속을 면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불거져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법원 재판도 결심이 임박해 심리적 부담감이 극에 달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 엘리트의 자존심 손상도 이유

정신과 전문의들은 “엘리트로 성장해온 자존심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이르자 극단적 행동을 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고려대의대 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자살은 자기애(愛)적 생각이 강한 사람이 곧잘 택하는 방법”이라며 “구차하게 설명하기보다 당당하게 모든 걸 떠안고 가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경우”라고 말했다. 유서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언급한 것이나, 대북사업 추진에 대한 소망을 피력한 것은 “현대가(家)의 적자가 자신임을 은연 중에 드러낸 부분”이라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전우택 과장은 “사회경제적 신분이 높은 계층일수록 일반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죄책감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초자아(superego)가 강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정신과 이창욱 교수는 “김윤규 사장에게 ‘자주 윙크하는 버릇을 고치라’는 충고는 유서에 쓸 말이 아니다”라며 “다소 냉소적으로 현 상황을 바라봤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잘 풀리지 않는 대북사업과 대북송금 수사를 받으면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평소 가벼운 우울증 증세가 나타났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