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정 교장은 졸업식·방학식 등 학교행사 때마다 영어로 ‘교장말씀’을 한다. 그는 “어차피 교장 얘기를 진지하게 들을 게 아니라면, 이런 특이한 교장이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랐다”고 말했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의 금산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김행정 (62) 교장선생님과 마주치면 영어로 인사를 건넨다. 김 교장이 운동장을 지나가면 교실 창문을 열고 “하이(Hi)!”라고 소리기도 한다.

김 교장은 금산 지역에서 ‘괴짜 교장’으로 통한다. 그는 1998년 금산군 남일중학교로 옮기며 ‘영어 인사’를 시작했다. 새 교장을 서먹해하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그는 ‘굿 모닝(Good morning)’ ‘하우 아 유(How are you)’ 등의 인사를 건넸고,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조회에서는 영어로 훈화를 했다.

“어떻게 하면 교장이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영어 인사를 생각했어요. 처음엔 인사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어색해했지만 이젠 자연스럽습니다. 애국조회 때 아이들이 교장 훈화를 감동적으로 듣지 않을 바에야 영어 공부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영어 훈화를 시작했지요.”

교장 말은 짧을수록 좋다는 생각에 따라 김 교장의 영어 훈화는 A4용지 반장 분량이다. ‘책과 꽃은 좋은 친구(Books and Flowers Are Good Friends)’ ‘고향을 사랑하자(Love Your Home Town)’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Roh Moo-hyun vs George W Bush)’ 등 주제도 다양하다. 하지만 짧은 글이라고 모두 이해가 되지는 않는 법. 김 교장은 매주 토요일, 그 다음주 월요일 애국조회 훈화 내용을 인쇄해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글 아래에는 주석도 달고, 뒷장에는 한글 번역본도 붙였다.

“영어교사를 30년 넘게 했지만,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아요. 글을 쓴 다음, 영자신문 칼럼니스트나 대학 외국인 강사들에게 교정을 부탁하죠.” 김 교장은 외국인 친구를 어떻게 사귀었냐는 물음에 “사실 얼굴을 본 적은 없어요.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면 대부분 내 뜻에 동참을 하죠”라고 말했다.

작년 9월 금산중·고등학교에 부임한 후엔 조회 제도가 없어져 ‘영어 훈화’할 기회가 없어졌지만, 그는 매주 학생들에게 영어 훈화자료를 나눠주고 있다. 물론 입학식이나 졸업식·방학식·축제 등 ‘교장말씀’이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그의 영어 연설이 등장한다. 그가 영역(英譯)한 교가도 들을 수 있다.

“올 2월 졸업식에서는 학부형들께 먼저 양해를 구한 후 영어로 얘기를 했어요. 물론 한글 번역본이 달린 원고를 미리 나눠졌죠. 어차피 교장 얘기를 진지하게 들을 게 아니라면, 이런 특이한 교장이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랐어요. 제 얘기를 주의깊게 듣는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김 교장은 다음달 27일 정년퇴임식을 갖고 교직에서 떠난다. 정년퇴임사도 물론 영어로 진행할 계획. 하지만 그는 학교를 떠나기가 아쉬운 듯했다.

“미스터 킴(김대중 전 대통령)이 교사 정년을 62세로 줄이는 바람에 벌써 학교를 떠나게 됐어요. 연령이라는 잣대로 정년을 정하기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경우에 따라)’로 정년을 조절하면 좋을 것을….”

그는 퇴임 후, 지난 5년간 썼던 영어 훈화 자료를 책으로 묶어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고, CD롬으로 제작해 학생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그는 또 시청 등에서 영어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코리아헤럴드 어스트랄러지(astrology·점성술)를 보니 내가 아직 관운(官運)이 남아있다고 합디다. 앞으로도 쉬지는 않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