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10 만세운동의 발단이 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과정 전체를 보여주는 사진 100여장이 이 운동 발발 77주년을 이틀
앞두고 8일 공개됐다. 순종 동생인 의친왕(李堈) 손자
이혜원(李惠源·48)씨가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을 통해
공개한「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은 창덕궁 빈소에 조문온 외국
사절과 돈화문 밖에서 통곡하는 학생들, 훈련원에서 펼쳐진 영결식,
청량리와 도농리를 지나 금곡 유릉(裕陵)에 시신을 모시고 다시 창덕궁에
돌아오는 순간까지를 기록화를 그리듯 세밀하게 담고 있다. 자료를
검토한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는 『「순종국장록」이란
자료집에 사진 30여장이 실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장례의 전 과정을
치밀하게 촬영한 자료는 처음 본다』면서 『조선시대 국상(國喪)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마치 사진으로 옮긴 것처럼 기록성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1926년 6월10일 새벽 창덕궁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훈련원에서 영결식을
치른 후,청량리, 도농리를 거쳐 금곡 유릉에 도착했고, 다음날 하관 등
의식을 마무리 한 후, 12일 오후 창덕궁에 돌아왔다. 사진첩에는
창덕궁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온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담은 장면에 이어
창덕궁 돈화문 밖에서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단체로 곡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순종 인산(因山)일을 기해 거사한 6·10만세운동은 3·1운동과
달리 학생들이 주체가 됐다는 점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다. 장례 행렬이
지금도 한양대 근처에 남아있는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건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사진들은 조선시대 의궤 속 그림을 통해서만 접하던 각종 민속 자료를
실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의 용구인 「죽산마」(竹散馬)와
「죽안마」(竹鞍馬), 방상시(方相氏) 등이 대표적. 왕릉에 함께 묻힌
유품 사진 중에는 순종이 보던 서책과 함께 회중시계가 포함돼 눈길을
끈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승하했다. 마지막 황제의 죽음이 대규모 항일
민족운동으로 발전한 데는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신문은 속보 형식으로 매일같이 장례 준비와 진행과정을
보도했으며, 고종(高宗)의 인산이 3·1 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을 떠올린
일제는 수십회에 걸쳐 신문 기사를 압수했다. 순종 승하 다음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자명종' 코너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어
압수당했다.
"5백년 종사의 마지막 황제이신 창덕궁 전하께서 승하하시고
보니…옛일과 지금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못이기는 장안의 시민들이
창덕궁을 향하여 구름같이 모여들고…돈화문 옛 대궐 앞에서 목을 놓고
통곡을 하니 그 옆에서 이를 보는 이들의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더우기 수백 수천의 남녀 학생들이 소복을 하고서 섧게 우는
양은 우리 조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자기네들의
신세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옛 대궐문 앞에 엎드려져 하늘을 우러러
목을 놓고 울어본들 시원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6월10일 인산 당일날 조선일보는 순종 황제의 사진을 독자들에게
나눠줬고, 장례식 후에는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사진 전시회와 영상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전국 각지에서 여는 등 6·10 만세운동의 확대에
기여했다. 조선일보 6월13일자에는 「인산 당일 신문 사진반에 대한
경무당국의 단속이 가혹」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6·10 만세운동을
보도한 조선일보 6월11일자 논설 「시국 동요의 일고찰」과 13일자 논설
「조선인의 진로」 등이 일제에 의해 압수됐고, 동아일보 6월11일자 논설
'정신력의 위대성'도 압수되는 등 고초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