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削髮)은 종교나 문화권에 따라 상징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종교에서는 속세를 떠나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행해졌으나,
세속에선 형벌이나 속죄의 방법으로 사용됐다. 현대에 와서는 동일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스포츠맨들은 '삭발투혼'으로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선 항의의 표시로
삭발하는 사례가 두드러진다. 시위의 수단으로 삭발이 남발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불교에서는 삭발이 곧 출가를 상징한다.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몸에
걸침으로써 속세를 떠났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도 평신도나
수도자가 성직자로 입문할 때 수도회에서 삭발례를 행했었다. 세상을
떠나 깨달음의 길에 정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때는 사나이가 죄를 지으면 삭발하여 5년간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 있었다. 아랍의 전통사회에서는 초범(初犯)일 경우 삭발로
응징하고, 또다시 죄를 지으면 수염을 깎아버렸다고 한다. 유럽
여러나라들도 간통한 여인을 삭발시켜 공개망신을 시키는 벌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도 기생이나 무당조합에서 품행이 나쁜 사람은 삭발추방하는
제도가 있었다. 극도로 인격을 모독하거나 생명을 끊는 것과 같은 수모를
주는 형벌이 삭발이었다.
한때 유럽에선 머리를 빡빡 밀고 청바지에 쇠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다니는 스킨헤드족(族)이 활개를 쳤다. 60년대말 영국에서 생겼다는
이들은 외양과 복장으로 일체감을 나누면서 광적인 축구열과 애국심을
공유했다. 또한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워 유색인종을 공격하는 과격
행동을 일삼았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나 영국의 축구스타 베컴 등이 했던
맨머리가 요즘 젊은층에도 번졌지만 본래 한국인들은 머리 자르는 것을
싫어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발부를 함부로 다루는 것을 불효로 여겨 일제의
단발령에 목숨까지 버리며 저항했다. 장발이 유행하던 60년대만 해도
경찰에 머리 잘리면 재수없다고 화를 내던 우리였는데 요즘와선
시위현장마다 삭발이 유행이다. 엊그제는 새만금개발을 예정대로
해야한다며 강현욱 전북도지사 등이 여의도에서 삭발시위를 벌였다.
박찬호나 차두리 등의 운동선수가 하는 삭발은 마음을 다잡아 스스로
분발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시다. 하지만 정치인 성직자 연예인 등이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는데 대한 항의표시로 군중 앞에서 머리를 깎는
시위방식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 들 뿐더러, 각박한 세상을 더
각박하게 만드는 것 같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게 일반인의 정서가
아닐까.
(정중헌 논설위원 jh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