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자씨(왼쪽), 전명자씨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56번 지방도 언덕길. 월드컵의 열기가 대한민국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한국인을 흥분과 감격으로 몰아넣고 있던 시점인 2002년 6월 13일. 6·13 지방 선거로 학교가 쉬는 바람에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 2년생 신효순과 심미선이 바로 이 언덕에서 미2사단 궤도차량에 치여 숨졌다.

지난 5월 22일 오후 6시, 이곳을 찾았을 때 현장에는 그 날의 참혹함을 상기할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사건 현장 위쪽에 세워진 추모비만이 그 날의 일을 묵언(默言)으로 증언하고 있다.

언덕길을 전후한 56번 도로 300m는 제한속도 30km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하지만 쉴새없이 오가는 차량 중에 제한속도를 지키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도로 양 옆 인도는 40~50cm에 불과했다. 또한 도로가 굽어져 있어 오가는 차량들은 행인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날 이후 더이상 미군 궤도차량은 이 길을 지나지 않고 있지만 인도가 좁고 또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희미해 행인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특히 트럭이나 버스가 지날 때마다 행인(行人)들은 움찔움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추모비가 세워진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미 2사단은 지난해 9월 21일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심미선과 신효순을 추모하며’의 제목이 붙은 추모비 비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2002년 6월 13일 불의의 사고로 열다섯 꿈 많은 나이에 생을 접은 신효순과 심미선. 모든 이들의 가슴에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그대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할 것을 약속하며 용서와 추모의 뜻을 모아 이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시를 바칩니다. 고운 넋 편히 잠드소서. 2002년 9월 21일 미 2사단 일동.’

추모비 앞에서 잠시 머물다 고(故) 심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沈洙輔ㆍ49)씨를 만나러 걸어가면서 기자는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언론에 수없이 시달렸을 법한데도 심씨는 전화 통화에서 싫어하는 기색 없이 한번 들르라고 했다. 대신 그는 “요즘 농번기라 너무 바쁘니 6시 이후에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또다시 그 날을 되살려내 이승에 없는 딸에 대해 추억하게 만든다는 게 얼마나 못할 짓인가.

미 2사단은 2002년 9월 21일 추모비를 세웠다(왼쪽). 사고 지점을 제한속도를 위반해 달리는 차량들. 도로가 좁아 차량들은 중앙선을 침범하는 일이 잦다(오른쪽).

▲“SOFA 불평등, 국민에게 알린 계기”

심수보씨의 집은 평범한 농가다. 마당에는 신효순양의 아버지 신현수(申鉉壽ㆍ49)씨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MBC ‘휴먼 다큐’ 제작팀으로 1주기를 맞는 두 유가족의 생활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심수보씨와 신현수씨의 얼굴은 지난해 겨울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을 취재하면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설지가 않았다. 심수보씨는 기자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거실 바닥에 앉은 뒤 기자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도 이 사건을 자기일처럼 가슴 아파했습니다. 정부 당국에 섭섭한 점이 있으시죠.”

심수보씨가 대답했다.

“국민들이 그렇게 힘을 몰아줬으면 정부에서 미국 정부에 압박해 소파(SOFA:한·미행정협정) 개정을 하게 했어야 합니다.(조금 말을 멈췄다가) 하지만 이 일로 SOFA 불평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씨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말을 이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대선 때는 (소파 개정에 대해)의지를 보이는 것 같더니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사정이 있는지 아니면 의지가 약해졌는지 SOFA 개정을 이뤄내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막내 따님 많이 보고 싶지요.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막내니까. 서른다섯 살에 낳은 아인데. 보고 싶고 아깝고. 하지만 볼 수 없죠.”

심수보씨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는 신현수씨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많이 눈에 선하죠. 부모가 되어서 못해준 것도 많은데…. 효순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좋았습니다. 예체능 쪽에 소질이 있어 그 쪽으로 보내려고 생각했었는데. 사고 바로 전에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양중학교를 대표해 혼자 전국대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효순이, 마라톤 선수 꿈꾸기도”

옆에 있던 심수보씨가 이야기를 거들었다.

“(이 사건이) 빨리 잊혀져선 안되지만 (한편으로는) 잊고 싶은 게 유가족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다시 신현수씨가 말을 했다.

“효순이는 마라톤 선수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림도 소질이 있었지만. 그래서 제가 육사 진학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옛날에는 여성 장군이 없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서 별을 다는 여군도 나오지 않느냐고 말했죠. 여자도 얼마든지 장군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집안에서 차별이 없이 키우셨군요.

“우리 집에선 내가 맥주를 마실 때도 딸들도 함께 마시라고 권했고, 실제 같이 마셨습니다. 어차피 크게 되면 술을 배울 텐데 (기왕 배울 거라면) 자연스럽게 좋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두 분이 작년 겨울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석한 모습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따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애들을 추모한다고 하면서 (애들의 죽음이) 선거운동에 이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추모는 추모로 끝나야지,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그러면 안되지요.”

또 일각에서는 추모 촛불시위를 반미(反美) 시위로 끌고 가려는 측면도 보였습니다.

“반미로 몰고 가는 건 저희도 원치 않습니다. 저희들 바람은 재판만 제대로 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힘을 몰아줬는데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약소 국가의 서러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다면서 심수보씨가 마당으로 나갔다. 심씨가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상을 나르는 동안 신현수씨와 대화를 나눴다.

서울 광화문에서 1주기 추모집회를 연다고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노인네들 돌아가셨을 때도 1주기를 못해드렸는데 (딸자식의) 1주기를 한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부모에겐 못해드리고 자식이라고 해서 1주기 하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제 딸도 고3이고 미선이 언니도 고3이니….”

심수보씨와 신현수씨는 미선이와 효순이가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장남인 심수보씨는 70살 노모를 모시고 있고, 신현수씨 역시 장남이다. 두 가족은 서로 농사일을 돕기도 했고 심수보씨의 마당에 모여 돼지고기도 구워먹는 등 사이좋게 지내왔다. 한편 심수보씨는 광적면 농촌지도자회 사무국장, 영농회장, 농업경영인회 감사 등을 역임했고, 부인 이옥자(李玉子ㆍ47)씨는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을 지냈다. 심씨의 집 거실에는 감사패, 위촉장 등이 여러개 놓여 있었다.

심수보씨 집 마당에서 함게 저녁을 먹는 신현수씨(왼쪽)와 심수보씨.

▲ 미선·효순 아버지 초등학교 동기동창

남편과 손님들이 삼겹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이옥자씨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미 사위는 어둠이 내린 뒤였다. 막 물을 댄 논에서는 무심한 개구리들의 합창(合唱)이 요란했다.
기자가 이옥자씨 곁에 다가갔다. 기자는 이씨에게 기자의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있었는데, 한 살 때 의료사고로 죽었다. 비록 얼굴도 못 보고 얘기만 들어온 누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문득문득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누이가 가끔씩 생각나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
미선이 생각 많이 나시죠.

“요새처럼 엄청 바쁠 때는 사실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하지만 가끔씩 일 없이 혼자 있을 때 미선이 생각이 납니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사회 일각으로부터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통령께서) SOFA 개정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서운했습니다.”

회담에서 얘기했는데, 언론에 발표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아니요, 언급하지 않을 걸로 알고 있어요.”

이옥자씨와 신현수씨의 부인 전명자(全明子ㆍ41)씨는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있은 5ㆍ18 기념식에 유가족 대표로 참석했다. 원래는 남편들도 초청을 받았으나 농사일이 너무 바빠 비울 수가 없어 두 사람이 대신 1박2일로 다녀왔다.

▲ "광주 5·18 기념식 갔다 와서 마음 불편”

현장에서 한총련 학생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막는 광경을 보았습니까.

“일국의 대통령인데 너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광화문 근처를 자주 오가는데 ‘여중생 범대위’측이 전시한 사진 때문에 기분이 언짢을 때가 많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만일 저 끔찍한 사진들을 유가족들이 본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옥자씨는 “거기(광주) 갔다 와서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고 말했다.

“애들 사진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애들 사고났을 때도 보여주지 않아 애들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마을 사람 중에 누가 와서 그러데요. 의정부 역전에 토요일마다 시위를 하는데 애들 사진을 전시해 놓은 상태에서 시위를 한다고 하데요. 눈 뜨고는 (그 광경을) 못본다고요. 제가 그랬어요. 사진만은 치워달라고 했어요. 유가족들은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사진 가지고 국민들 자극하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씨는 이렇게 말하곤 잠시 말을 잊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는 내 딸의 예쁜 모습만 떠올리고 싶지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옥자씨는 이렇게 말하곤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들은 ‘단체’들에 제발 그런 것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씨는 또다시 말을 멈췄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이런 피해를 입지 않게 (조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씨는 또 고개를 돌려 어둠에 묻힌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식구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애들도 눈치를 살핍니다.”

이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앞세운 부모 마음 누구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박혀 있어요. 그래서 뭐라고 소리를 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녁 식사 자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기자는 몹시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상금 받으신 것 어떻게 했습니까.

“보상금, 손 못대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손대나요?”

이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미선이가) 보고싶은 마음에 앨범을 넘겨보지만 미선이는 이 에미가 보고 싶지 않은지 꿈 속에 안 나타더군요. (미선이는) 뭘 사달라고 하는 법이 없었어요.”

▲ 미선에게 MP3 못사준 것 마음에 걸려

혹시 따님이 해달라고 한 것 중 못해줘서 마음에 걸리는 건 없나요.

“그거 귀에 꽂고 다니면서 음악듣는 거 뭐죠. (MP3를 지칭하는 듯) 미선이가 그것 좀 사달라고 했는데, 제가 추수하고 가을걷이하면 사준다고 했어요. (지금 와서 보면) 얼른 사줄 걸 후회가 됩니다. 미선이의 빈자리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다섯 식구가 함께 밥을 먹어도 (말이 없고 웃음이 없는 게) 꼭 싸운 집 같아요.”

어머니 이씨는 6월 12일 밤 막내딸과 함께 잤다. 그날 따라 막내딸이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엄마 냄새가 너무 좋다.”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시간은 밤 9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기자는 5월 23일 또한번 효촌2리를 찾아갔다. 전날 만나지 못한 효순이 어머니(전명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미리 전화를 걸었을 때 전명자씨는 “모판을 날라야 하니 6시 이후에나 일이 끝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신현수씨(왼쪽), 심수보씨.

신현수씨 집은 심수보씨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신씨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쯤. 신씨 집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농가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두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림집으로 연결된 문은 비닐을 덧대어 바람을 막고 있었다. 기자가 밖에서 여러차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덧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전명자씨가 방에 누워 자고 있었다. 또다시 인기척을 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때 옆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전씨의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신성훈)이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 전씨는 아들이 몸을 흔들어 깨워서야 비로소 잠에서 깨었다. 신씨는 정신을 차린 뒤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작업복 바지는 흙이 여기저기 묻어 엉망이었다. 전씨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모판을 나르는 일을 했더니 너무 힘들어 그만 쓰러져 잠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목이 쉬어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몸이 안좋은 상태에서 힘들게 일을 했더니 목이 잠겼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효순이와 미선이의 1주기가 되는데, 어머니로서 바라는 게 있을 텐데요.

“꽃동산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한다고 하는데 길을 넓혀서 사람들이 오가면서 볼 수 있게 꽃동산을 꾸몄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속상하고 가슴 아픈 거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막내아들 성훈이가 가끔 누나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합니까.

“가끔 가다 (효순이) 누나 친구를 봤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누나가 입던 교복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전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효순이는 (농사일이) 바쁠 때면 학교에서 돌아와 밥해 놓고 집안 청소 다 해놓고 엄마, 아빠가 일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제 일을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였죠. 요즘 농사일이 바빠지니까 더 (효순이가) 생각나네요.”

국민 모두가 이 사건을 내 일처럼 가슴 아파했습니다. 1주기를 맞아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온국민이 나서서 (추모)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죠. 사실 사건이 월드컵 중간에 발생했잖아요. 저는 그래서 (사건이) 가려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뉴스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해서 국민들이 알아서 힘을 모아주니까 그저 고맙기만 합니다.”

전씨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앉아있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유쾌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붙들고 있는다는 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1주기 행사 때 유족들 헤아려 줬으면”

기자는 온 길을 되돌아가 다시 심수보씨 댁을 찾아갔다. 이옥자씨 가족들은 마침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자가 들어가자 이씨는 “시장하실 텐데 음식부터 드시라”고 말했다. 이씨는 “기자들이 자꾸 찾아오니까 심란해진다”고 말했다.

1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성원에 고마울 따름이죠. 사실 (이 사건이) 잊혀져도 할 말이 없지만 잊지 않고 관심 가져주신 거 고맙게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도와줬으면 정치권에서 (성과를) 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국민들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지는 1주기 행사에 참석할 예정입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행사 주최측에 혹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떤 겁니까.

“1주기 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애들의 끔찍한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피했으면 합니다. 굳이 그런 거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이) 알 것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발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사진 보면 (유가족) 가슴만 찢어지는 거잖아요.”

신현수ㆍ전명자씨와 심수보ㆍ이옥자씨 부부. 두 부부의 일상은 그 날 이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두 가족은 미선이와 효순이가 살아 있을 때처럼 여전히 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고 있다. 달라진 거라면 1주기가 다가오자 언론을 비롯해 여기 저기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 반복되는 똑같은 질문에 속이 상하고 짜증이 날 법한데도 이들 부부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손님을 맞고 성실하게 답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틀 동안 겪어본 두 가족들은 법 없이도 살 그지없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 한없이 착하게만 살아온 이들에게 닥친 시련을 이들은 자연의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