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일본에서 140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쯤되면 애니메이션이라도 '대작'이라 칭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아닌 작품으론 기록적으로 240억원을 들인 130분
이상 러닝 타임의 작품이라는 외형적 요소 때문이 아니다. 1997년
일본에서 개봉되어 무려 1400여만명을 동원한 '모노노케 히메'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꿈꿀 수 있는 미학적 야심의 극대치를 보여준다.
'이웃집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계에서 이미 더 이상 알려질 수 없을 정도의
명성을 갖고 있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 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저주받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여행하는 소년
아시타카가 숲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과 맞서는 소녀 모노노케 히메를
만난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중세 일본을 배경으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다룬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만들어내는 '창조주로서의
예술가' 이론의 확실한 적용례를 보여준다. 동물의 형상을 빈 각종
신(神)들의 기기묘묘한 모습에서부터 그런 신들과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는 장면의 화려한 묘사까지, 감독은 독특한 이야기 전개와 빼어난
표현력으로 진기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미야자키의 작품을 계속 보아온 관객들에게 '모노노케 히메'는 익숙한
부분이 많다. 일본 특유의 다신론적 세계 속 인간과 자연의 갈등이란
오랜 테마가 있고, 강인한 소녀 주인공이 있다. 풍요로운 숲을 그려내는
그의 한 손은 환희에 들뜨고, 오만한 문명을 묘사하는 그의 다른 손은
탄식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비폭력적 메시지를 전에 없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달함으로써 팬들을 당혹케 한다. 미야자키 특유의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느낌은 찾기 힘든 반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장엄한 묵시록적 비전은 어둡기 그지 없다. 그리고
복잡하게 꼬인 스토리는 내용 속으로 쉽게 몰입할 수 없도록 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메시지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세계에 풀어놓은 듯한 '모노노케 히메'는 두 작품에 비해서
세기(細技)보다는 박력에 주력하고, 이야기보다는 메시지에 치중했다.
희망이 있다면 '살아내는 것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미야자키의
목소리는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모노노케 히메'는 국내에서 '전체 관람가' 등급으로 상영된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는 아이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부모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도 모를 '예외적인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