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딸이 제가 출장간 줄 알고 빨리 인형 사가지고 오라고 울먹여요.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순간의 유혹을 넘기지 못해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재작년 동네 구멍가게를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강모(51)씨는 현재 부정수표 발행 혐의로 대구에 도피 중이다. 주택 대출 등 카드빚 1000만원 때문에 신용불량자였던 강씨.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중년 사내로부터 “유통 회사를 차리려는 데 함께 일할 사람이 없다”며 “나랑 사업을 하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꾸준히 월급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강씨는 “아내가 가정부 생활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인감 도장·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한다기에 찜찜했지만 동업 관계라 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년 사내는 자신이 서류상 문제가 있다며 강씨의 명의로 회사를 등록시켰고, 강씨는 운전사로 일하며 매달 200만원씩 월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월 갑작스럽게 그 사내와의 연락이 끊기더니 회사 부도로 자신의 이름으로 남발된 수억 원의 수표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됐다. 강씨는 명의를 빌려줬다가 '유령회사'에 당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서울 북창동 등 지하다방에 저같이 돈에 목마른 사람들을 '바지 사장'으로 세워준다며 꾀어 수수료를 받는 이들이 널려 있어요. 무서운 세상입니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취업에 목말라 있는 실직자들을 등치는 '유령회사'들이 다시 설치고 있다. 이들은 외환위기 때 주로 노숙자들을 상대로 명의를 도용했으나, 이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카드빚 신용불량자나 실직자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유령회사 사기단은 사무실만 차려놓고 남의 명의로 수표·어음을 남발해 할인업자들에게 팔아 돈을 챙긴 뒤, 고의로 부도를 내고 사라진다. 주로 전과가 있는 3~4명으로 구성된 사기단은 우선 구인광고를 내 실직자들을 모집하거나 주위에서 돈이 궁한 사람을 소개받는다. 찾아온 실직자들에게 채용을 미끼로 "사소한 법적 문제가 있으니 명의를 빌려달라"는 수법을 쓰고 있다.
유령회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선 담당 경찰들은 "고의로 부도를 내는 유령회사들이 작년에 비해 평균 10~20% 가량 증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 여름 10년간 다니던 관광회사에서 실직한 뒤 카드 빚에 허덕이던 정모(38)씨는 ‘대표이사 구함’이라는 섬유회사의 신문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회사는 “명의를 빌려주면 월 20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빈털터리였던 정씨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담당자가 신용불량자 신세라 명의를 빌리자고 했다”며 “법적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며 각서까지 써줘 믿었다”고 말했다.
한순간 실직자에서 ‘바지 사장’이 된 정씨는 은행 심부름 등 잡일을 하며 석 달 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차츰 월급이 연체되더니, 작년 11월 회사가 부도나 직원들의 연락이 끊겼다. 각서도 공증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정씨는 20억원 가량의 채무를 지고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5개월 가까이 여관을 전전하고 있는 정씨는 “살이 10㎏ 넘게 빠져 지금은 맞는 옷이 없다”며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술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유령회사의 ‘바지 사장’이었다가 이런 식으로 지난 2001년 여름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힌 김모(47)씨. 그는 이미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우리들의 인적사항을 불지 않는다면 감옥에 가도 현금 2000만원과 매달 영치금 30만원씩 넣어주겠다”는 유령회사측의 제안에 또 다시 넘어갔다. 그러나 재판이 끝나자 유령회사측 사람들은 종적을 감춘 것이다. 김씨는 “당장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유령회사측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고 후회했다.
송용욱(宋龍昱) 경찰청 계장은 “노련한 유령회사의 사기꾼들에게 ‘바지 사장’들이 놀아나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무심코 명의를 빌려주고 낭패를 봐도 결국 공범이므로 피해보상 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