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브론슨


매료당했던 배우를 말해 보라면, 나는 찰스 브론슨을 첫번째로 꼽아야
한다. 그의 표정을 흉내내 보려고, 어린 나는 아버지 중절모를 훔쳐 쓰고
얼마나 오래 장롱 거울 앞에 서 있었던가.

내게 영화는 단체관람과 '주말의 명화'로 다가왔다. 단체관람으로
'취권'을 보곤 쉬쉭, 입소리로 흉내내며 친구와 무술시합을 벌이다
선생님한테 걸려 벌을 서고, 아홉시면 주무시는 부모님 때문에 볼륨을
잔뜩 줄이고 숨죽여 '주말의 명화'를 보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나마 충주시로 이사한 중학생 때 기억이고, 시골에서 자란 초등학생
때까지는 영화를 본 기억조차 없다.

찰스 브론슨(오른쪽에서 세 번째), 율 브리너, 스티븐 매퀸등이 주연한 서부영화 ‘황야의 7인’.

내가 접한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 포스터가 전부였다. 마을회관 담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야말로 시골 꼬마들에겐 너무나 강렬한
이마쥬였다. 그것은 마치 감자나 생무조차도 달게 느껴지는 입맛을 가진
시골 아이들이 어쩌다 맛보는 달착지근한 '아이스께끼'와도 같았다.

포스터가 바뀔 때마다 몰려가서 넋을 잃고 올려다 보았는데, 어차피
시내까지 나가 영화를 관람할 형편이 못 되었던 우리들로서는
포스터만으로 만족해야 했고, 때문에 형들에게 쥐꼬리만한 정보라도 먼저
들은 아이가 있다면 의기양양하게 나서서 얘기의 주도권을 쥐고 해석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한 장의 포스터를 앞에 놓고, 우리는 그때 얼마나
많은 상상과 황당무계한 궤변을 서로 떠벌였던가.

그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찰스 브론슨의 모습이다.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 쓰고 넝마 같은 끌차에 누워 세상을 비웃으며 방랑하는
주인공인 그의 모습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그 포스터 모습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 영화를 마치 수십 번은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내 기억으로 그 포스터 제목은 틀림없이 '내 이름은 튜니티'였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 영화에 찰슨 브론슨은 출연하지 않았다. 그
포스터 주인공은 테렌스 힐이거나 버드 스펜서였나 보다. 어이없게도
찰스 브론슨이 출연한 다른 영화와 그만 혼동을 한 것이다. 혹은 우리가
흔히 예쁜 목소리와 예쁜 얼굴을 까닭 없이 짝지어 상상하듯, 가장 인상
깊은 포스터와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한데 묶어 기억해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너무 오래 혼동하여 기억한 나머지, 이젠 '튜니티' 영화에 찰스
브론슨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어쨌든 내가 제일 좋아한 배우는 찰스 브론슨이었다. 특히 내 기억
속에서 슬그머니 합성된,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넝마 같은 끌차에
누워 세상을 비웃으며 방랑하는 총잡이 튜니티 역의 찰스 브론슨 모습은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조차 감히 견줄 바가 못 된다.

시골에서 자란 탓에 영화를 포스터로나 접했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포스터만으로도 커다란 자극을 받았고, 또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칠 수 있었다. 심지어 찰스 브론슨 주연의 튜니티 영화까지 '제작'할
수 있었다. 포스터 앞에 몰려 서서 나와 함께 열띤 상상과 궤변의 잔치를
벌이던 친구들이 새삼 그립다. 혹시 그들이라면 내가 감독하고 찰스
브론슨이 출연한, 그 멋진 튜니티 영화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이만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