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시카고 감옥을 배경으로 스타 가수를 꿈꾸는 여죄수들과 능수능란한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르네 젤웨거, 캐서린 제타존스, 리처드 기어 주연의 뮤지컬 영화 '시카고'.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롭 마셜 감독의 '시카고'가 작품상과
여우조연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자, 영화기획자 김익상씨와 고형욱씨는
개봉하자마자 당장 보러갈 기세였다. 둘 다 뮤지컬 영화라면 흑백
고전영화부터 빠짐없이 본 매니아들. 그러나 막상 '시카고'를 보고난
뒤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김익상 =내가 좋아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영 실망이야. 누가 "그 영화
재밌냐"고 물으면 난 "어수선하기만 하고 남는 게 없다"고 말하겠어.

▲고형욱 =나라면 "즐거운 노래와 화려한 춤이 있는 버라이어티쇼"라고
답하겠어. 무슨 교훈 같은 걸 기대했나 본데, 그냥 쇼를 즐기라고.

▲김 =이게 무대 뮤지컬이라면 모르겠지만, 영화잖아. 그럼 좀더
영화적이었어야지. 이건 중계 잘 된 방송국 콘서트 수준이야. 라이브
공연 녹화도 이 정도 앵글이나 컷은 잡아낼 수 있다고.

▲고 =영화니까 이렇게 현실과 팬터지를 교차편집하는 묘미를 발휘할 수
있었지.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조명과 카메라 워크만으로도 굉장히
다양하게 표현했잖아.

▲김 =협소함을 커버하려고 요란한 조명과 카메라 워크를 동원한 게 난
오히려 더 거슬리더라.

▲고 =춤과 노래의 어우러짐도 절묘해. 여죄수들이 과거를 소개할 때는
슬프면서도 화려한 탱고를 깔고, 기자회견으로 매스컴을 농락할 때는
인형극을 벌이고, 정신없는 쇼로 법조인을 교란시키는 법정에선 탭댄스로
모든 걸 풀어내고 말야. 곁들여진 군무도 정말 훌륭했고.

▲김 =옛날 뮤지컬 영화를 보면 정서적 만족감이 잔영처럼 남았는데,
'시카고'는 오로지 볼거리 뿐이야. '7인의 신부'가 보여준 역동적인
군무와 자연경관의 조화, '메리 포핀스'가 준 상상의 나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느껴지던 젊은이들의 열정, '마이 페어
레이디'에 드러난 인간심리에 대한 고찰,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융화돼 간 과정, 그런 게 '시카고'엔 없어.

▲고 =이 영화는 이야기이기 이전에 쇼야. 복잡한 플롯보단 화려한 볼거리가
우선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중시할 거면 '디 아워스' 봐.

▲김 =배우 캐스팅도 무성의했다고 봐. 줄리 앤드류스나 진 켈리처럼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하던 왕년의 배우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싶더라.
리처드 기어의 노래는 정말 들어줄 수가 없더군. 우울한 이미지의 배우가
귀여운 표정으로 '안 되는' 탭댄스하는 걸 보니 민망하더라. 극중
변호사 빌리는 관객의 심정적인 동조를 일으키는 매력적인 악당이어야
한다고. 차라리 휴 그랜트였다면 어땠을까.

▲고 =(코웃음 치며)'어바웃 어 보이'에서 '킬링 미 소프틀리' 부르던
그 노래실력으로? 하긴 리처드 기어의 속옷 차림은 나도 좀 보기 그랬지만,
인형극에 탭댄스까지 충분히 제값은 했다고 봐. 르네 젤웨거도 귀엽고
낙천적인 캐릭터에 어울리잖아? 캐서린 제타존스는 어찌나 압도적으로
파워풀한지, 그 못생긴 가발마저 안 씌웠더라면 젤웨거를 완전히 가려버렸을
것 같더라. 빅 마마 역의 퀸 라티파와 록시 남편 역의 존 라일리도 탄탄했고.

▲김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뭐냔 말야. 법조계와 매스컴의
타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낙천적인 얘기도 아니고. 사회풍자를 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모든 걸
쇼로 묻어버리잖아.

▲고 =치정살인조차도 무대에 올리면 환상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게
뮤지컬의 특징이라고. 드라마가 그러면 현실왜곡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의 경우에는 그게 장점이 된다고 봐. 뮤지컬은 꿈이고
환상이고 도취니까.

▲김 =뮤지컬이면 뮤지컬답게 아름답고 충만하게 만들던지, 아니면 그냥
정통 사회드라마로 가든지 했어야 한다고 봐. 누아르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악당이어도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데, '시카고'에서
동조할 인물이 있었냐고.

▲고 =여섯 여인의 살인 동기를 보여줄 때 응원하게 되지 않아?
록시도 팜므 파탈(악녀)이지만 관객이 동조하는 캐릭터니까 혼자 초라하게
오디션 받는 걸로 끝내지 않고 화려한 재기무대를 넣었잖아.

▲김 =몸매 감상하는 건 자극적일 수 있겠지. 하지만 다 잘 빠진 인형일
뿐이야. 쇼의 다양성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잃어버린 것 같아.

▲고 =단돈 7000원으로 이렇게 화려한 쇼를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나는
대만족이야. 이걸 무대에서 본다고 생각해 봐. 최소 5만원, 많게는
10만원 이상 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