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1조 ’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윤락녀 역을 맡아 거침없는 연기를 보여준 예지원.그는 “여배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연기일수록 더 재미있다 ”고 말했다.<a href=mailto:gibong@chosun.com>/전기병기자 <


고정 관념이 깨지면 먼저 당혹감이 밀려온다. 그런데 그 당혹감이
사그러들 때쯤이면 묘한 쾌감이 배음(背音)으로 깔린다. 그 고정 관념을
만들어온 두터운 퇴적층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질 때의 통쾌함이다.

예지원의 연기 궤적은 '여배우'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부수며 걸어온
길에 다름 아니다. 개봉을 한 주 앞둔 정치 코미디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도 그랬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매춘부 고은비 역할을
맡은 그는 정치가 이뤄지는 광장이든, 매춘이 벌어지는 밀실이든 그
어디에서나 거침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소리쳐 외치는 주제와 속에 품은
마음이 다른 듯한 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선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지만,
예지원의 넘치는 에너지 만큼은 관객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매춘부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다는 설정이 흥미로워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찍으면서 재미는 점차 감동으로 바뀌었어요.
실제 장애인 분들과 노숙자 분들이 대거 엑스트라로 출연해서 제 이름을
외치는 클라이맥스 유세 장면에선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역할이 역할인지라 이 영화의 노골적인 음담패설 같은 부분은 여배우로서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왜 그렇죠? 전 그냥 그들의 생활로 받아들였더니
아무렇지도 않던데요."

그렇다면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국회 담 넘는 장면은?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상황에서 설마 국회 촬영이 벽에 부딪치리라 생각
안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어요. 정치를 소재로 삼는 영화를 하면서도 실감
못했는데 정말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 폐쇄적이구나, 이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 닫힌 국회 정문을 넘어가며 영화를 찍어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코미디구나, 실감했죠."

사실 그는 데뷔 초기 '고전적 외모'로 각광받았다. 데뷔작이 '96
뽕'이었고, 일반 관객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 1920년대
상하이의 고혹적인 클럽 가수 역을 해냈던 '아나키스트'였으니까.
"예전엔 그런 외모를 스스로 참 싫어했어요. 키도 컸으면 좋겠고, 눈 코
입도 입체적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컴플렉스가 없어졌어요.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으니까요."

불량스런 여고생 역할을 코믹하게 펼친 TV 드라마 '여고시절'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남자를 당황하게 하는 스토커로 나온 영화 '생활의
발견'에 출연하면서 변화의 계기가 왔다. "관객 사랑을 처음
발견했다고 할까요? 너무 좋아들 하시더라고요. 예전에는 거리에서 저를
알아봐도 그냥 서로 귓속말을 하셨는데, 그 두 작품 이후엔 적극적으로
제 이름을 불러가며 친숙함을 표시하시니까요."

성(性)에 대해 파격적으로 논하는 페미니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동성애와 양성애가 SF 형식에 뒤얽힌 컬트 뮤지컬 '록키 호러 쇼',
조직폭력배의 여자로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는 해프닝 코미디 영화
'2424' 등 '과격한' 연기가 계속 이어졌다. 한창 마무리 촬영중인
영화 '귀여워'에서도 " '길'의 젤소미나와 '아멜리에'를 합친 것
같은" 뻥튀기 과자 장수로 나온다.

"'망가지는' 배역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라고 묻자 곧바로
"재밌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을 찍을 때 얘기를 들려줬다. "전 얼굴이 잘 붓는 편이라서 항상
촬영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면서 준비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 최대한 저를 편하게 연기하도록 유도한 감독님이 일부러 밤새
술먹이고 퉁퉁 부은 상태에서 특정 장면을 찍게 했어요. 그 장면 찍을 때
구경하던 사람들이 '예지원 실물은 참 못생겼네"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통쾌하더라고요. 해방감 같은 거였죠."

배우로서 자신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체력'을 꼽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화 감독의 최고 덕목은 '튼튼한 다리'라고 말한
일본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영화인들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정신이 잠들지 않도록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