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나는 순정만화가 강점을 지닐 수 있는
분야로 로맨틱 코메디를 꼽겠다. 일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 섬세한 감정
묘사, 작은 것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 민감함이 순정만화의 힘이라면
로맨틱 코메디에 요구되는 것들도 바로 그런 요소들이니 말이다. 대다수
순정만화가들이 모두 로맨틱 코메디 한 두 편쯤 선보이고 있지만
김지윤을 결코 빠뜨려서는 안된다.

굳이 요약하자면 김지윤의 작품은 감각적인 만화에 속한다. 다른
작가들의 장편에 비해 턱없이 짧은 그의 작품에서 신일숙이나 김혜린처럼
독자를 위압하는 카리스마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숭배하기
위해서만 만화를 보는 것은 아닌 법. 유쾌한 내용전개에 몸을 맡긴 채
청신하게 기분을 풀어줄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김지윤의 만화가 제
격이다. 입가로 번지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한층 쇄락해진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세 편의 만화를 함께 묶어 놓은 '에덴의 남쪽'이 김지윤의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인어공주의 역할을 바꿔 패러디한 표제작
'에덴의 남쪽'도 재미있지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2부작으로
구성된 '러브 스터디'(Love Study).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여자가 원하는 것'(What Women Want) 등의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메디의 전형처럼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다가 점차 서로에게
빠져드는 남녀 대학생의 사랑이 깔끔하게 묘사되어 있다. 순진한 흥미가
뻔뻔한 호영이에게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며 행복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러브 스터디'는 1990년대 순정만화의 중요한 성취인 우리식 그림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바비 인형식 외모의 등장인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길거리에서 언제라도 흔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여주인공 흥미의
옷차림은 차라리 수수하게까지 보인다. 이를테면 '언플러그드
보이'(천계영)의 현겸이처럼 낯간지러울 만큼 주인공을 이상화하는 법도
없다. 대학가의 스터디 그룹이나 대학축제 마당의 장터 등 만화를
구성하는 에피소드와 소재들도 충분히 일상적이며 또 한국적이다.

김지윤의 만화는 1990년대 우리 대중문화의 큰 흐름인 일상화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과장이나 엄숙함을 넘어 일상의 생활을 대중문화에
담으려는 경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우리 사회의
대중이 그만큼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김지윤의 지명도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순정만화의 주독자인
10대에서 20대 초반 여성들의 사회적 위상이 충분히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회적 위상이 올라가 마침내 환상의 세계에
대한 집착을 극복할 때 우리 순정만화의 세계는 훨씬 더 풍부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정준영·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