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9년 처음 발견된 이후 계속돼 왔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의 진위(眞僞)를 둘러싼 논쟁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화랑세기'를 필사했던 인물로 알려진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씨가 신라사(新羅史)에 대해 쓴 논문이
처음으로 발견됐기 때문. 일본근현대사 전공자인 박환무씨(한양대
강사)가 곧 발간될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에 공개하는 박창화씨의
글은 1927년 12월과 1928년 2월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잡지
'중앙사단(中央史壇)'에 실린 '신라사에 대하여'라는 미완성
논문이다.
'화랑세기'는 8세기 신라 성덕왕 때 한산주도독을 지낸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신라 화랑의 전기이자 역사책이다.
오랫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이 책은 1989년과 1995년에 두 종류의
필사본이 발견됨으로써 학계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만일 이것이
진본이라면 고려시대 이전에 씌어진 유일한 사서(史書)로 신라사 연구의
혁명적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근친혼과 동성애
다부제(多夫制)와 같은 고대사회의 충격적인 풍속도는 여태껏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진본론'을 주장하고 1999년엔 역주본까지 낸 반면,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은 "필사자인 박씨가 직접
창작했거나, 그가 본 원본이 위작일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박창화씨는 1933~1945년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성 도서료(圖書寮)의
사서로 일하면서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겼고 많은 한문 소설도
썼지만, 실제 어느 정도로 신라사에 정통한 인물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번에 발견된 박씨의 논문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신라사를 다룬 사서들을 비교하며 신라의 국호와 왕호, 불교 전래시기
등에 대해 상세한 고증을 시도하는 내용이다. 이 논문을 발견한 박환무씨
측은 "박창화씨는 신라의 문자 사용과 불교 도입의 연대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자 했음이 논문에서
드러났다"며 "이로써 박씨가 탁월한 상상력으로 '화랑세기'를 조작한
인물이 아니라 신라를 복권하고자 했던 역사가였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논문에 나오는 ▲신라가 신도(神道)의 나라라는 견해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匣) 설화를 비처왕비의 간통사건으로 본 것 ▲실성왕비의
이름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류(阿留)가 아닌 내류(內留)라고 적은
것은 오직 현존 '화랑세기'에만 보인다는 점 등을 들어 "박씨는 이
논문을 쓰기 전에 원본 '화랑세기'를 보았음이 확실하며, 박씨가
필사본을 위작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역사비평'에 반론을 쓴 충남대 백제학교육연구단 윤선태
교수는 박창화씨 논문에서 ▲사금갑 사건의 해석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나오며 ▲실성왕비를 '내류'라고 적은 사례는
광산김씨 등 일부 족보류에서도 나온다고 지적, '화랑세기'와
관계없이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내용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윤 교수는 또
"이 논문에선 박씨가 이두 등 신라의 문자표기법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을 보여준다"며 '화랑세기' 필사본에 실린 향가
'송사다함가' 역시 박씨의 위작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