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에 속고 선거에 울었던' 이들이 엉뚱하게 고깃집을 열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정치 낭인(浪人)들의 이 모임방은 노무현 차기 대통령과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 내정자를 배출한 데 이어, 정·관계 실세가 후속 중용될 산실(産室)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역삼동 한우(韓牛)음식점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처럼, 당장 쓸모가 없어도 때가 되면 요긴한 몫을 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97년 3월 전·현직 의원 10명(김홍신·제정구 의원, 김원웅·노무현·박계동·박석무·원혜영·유인태·이철·홍기훈 전 의원)
이 중심이 돼 만든 한우 고깃집이다.
유인태 전 의원이 “정치자금도 걷고 훗날 그럴듯한 정책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낙선 의원끼리 식당이나 차리자”고 처음 제안했지만, 실은 농담조였다. 각 신문 정치면 가십란에 이런 기사가 게재되면서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떨어지고도 공약(空約)이냐’는 비난을 들을 바엔 아예 공동 창업이 낫겠다”고 합의했다. 이들은 보증금 2억원·월세 1000만원 하는 1·2층 건물에 172석 규모의 식당을 차렸다.
‘낙동강 오리알’ 처지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업소명을 당초 ‘오리알 식당’으로 하려다가, 너무 심한 자기비하라는 지적과 입시철 매출 급감 우려 등을 이유로 투표 끝에 ‘하로동선’으로 지었다.
모임이 낙선자들로만 구성됐던 것은 아니다. ‘현역’ 신분으로 참여한 김홍신 의원은 “정신적 통로가 비슷하고 돈이 뻔한(궁한) 사람들이 ‘생활·정치 자금을 직접 벌어서 모으자’는 취지로 뭉쳤다”고 했다.
96년 총선을 치른 이듬해여서 공동 주주들의 ‘실탄(현금)’은 대체로 동이 난 지경. 이들은 ‘맞보증’ 형식으로 은행 대출을 받았고, 1인 2000만원씩 출자해 4억여원을 모았다.
이들은 요일마다 하루 2명씩 당번을 정해 손님들 탁자를 돌며 고기를 굽고 술 시중도 들었다. 그 덕에 창업 직후엔 성업이었다. 청문회 스타·재야(在野) 출신 등 ‘청결 이미지’에 반한 지지자들은 단골·예약·단체 손님이 됐다. 식당 문에 붙인 ‘오늘의 당번’ 대자보를 우연히 보고 들르는 행인들도 있었다.
손님들이 건네는 술을 거절 못하는 박석무 전 의원은 당번을 마치고 퇴근할 즈음엔 거의 만취 상태였다고 한다. 의원들 사이에선 ‘내가 당번 서는 날 손님이 많아야 면이 설 텐데…’하는 묘한 경쟁심리가 발동했다. ‘끈’을 잡을 욕심에 찾는 정계입문 희망자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낙선 의원들의 모임이 아주 침울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속 울분이 어찌 없겠습니까? 격한 토론은 없었어도 ‘와신상담'의 분위기는 역력했죠.” 의원 보좌관 A씨는 당시 분위기를 그렇게 전한다.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등산복 차림의 팔순 노부부가 있었죠. 노부부는 ‘아들·며느리가 당신들 팬'이라면서 ‘정치하듯 식당 하면 망할 거고, 식당 하듯 정치하면 성공할 거다’라더군요.” 하로동선 초대사장인 김원웅 의원의 회고다.
하로동선 창업주들은 “웃돈·가욋돈을 내는 손님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가게를 인수했던 B씨의 기억은 다르다. B씨는 “영업장부를 검토해 보니 개업 초기엔 하루 매출액이 납득 못할 만큼 컸고, 당시 물가에 비해 객당가(客當價·1인당 매출액)도 말이 안 되게 높았다”고 했다.
하로동선은 첫해 부가가치세로 약1억원을 납부했다. 창업주들은 “이중장부 없이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불성실 신고를 전제로 세율을 높게 매긴 세정(稅政)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그때 깨닫게 됐다”고 했다.
하로동선은 오래 못 갔다. 공동 주주들이 가게를 제대로 관리한 기간은 1년 남짓이고, 그 뒤 99년 가을 가게를 팔기까지는 명의만 빌려준 셈이었다. 인건비 부담이 높았고, 질 좋은 고기를 정확한 양에 팔면서 세금을 100% 낸 데다, O-157 파동이 터진 것이 그 이유라고 하로동선 멤버들은 설명했다.
‘하로동선 쇠락’의 결정적 계기는 97년 대선이었던 것 같다. ‘보스정치·3김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웠던 이들이 기존 체제에 ‘투항’했다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었다. 하로동선 손님들도 “너희들마저 갈라서느냐”고 대놓고 힐난하는 일이 흔해졌다고 한다.
하로동선은 그 뿌리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 두고 있다. 90년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을 거부했던 통일민주당 멤버, 95년 DJ 정계복귀를 비판하고 국민회의 창당에 반대했던 통합민주당 잔류 멤버들이 주축이 돼 ‘통추’를 만들었고, 김원기 당시 전 의원(현 대통령 당선자 정치고문)이 대표를 맡았다.
통추 회원들은 96년 총선 출마 때 서울에서 노무현·이철·박계동·유인태, 부산 김정길, 정읍 김원기, 대전 김원웅씨 등이 나서 3김씨의 ‘표적공천’에 맞섰지만 대부분 ‘장렬히 전사(戰死·당시 언론 표현)’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새 판 짜기’에 여념이 없던 정파들 사이에서 통추는 한때 상종가였다. 통추는 ‘제3후보론(조순)’ ‘정권교체(김대중)’ ‘3김 청산(이회창)’을 놓고 논의를 벌이다가, 대선 한달 전쯤 제주도의 한 호텔에 모여 ‘사실상 해체 선언’을 하게 된다.
"개인의 선택이 어찌 됐건 서로를 비난하지 말자. 국민들은 총선에서 우리(꼬마민주당)를 지켜주지 못했고, 이제 현실적으로 (한나라당·국민회의로)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언젠가 함께
일할 날이 올 것이다."그 날 이런 요지의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통추는 정식 출범 1년 만인 97년 11월 간판을 내렸다. 국민회의로 간통추 주류인사들은"어제는 '3김청산', 오늘은 '2김(DJP 연합) 떠받들기'냐", 한나라를 택한 이들은 "저항 끝에 5·6공 세력과의 재결합이냐" 같은 유권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하로동선은 주인이 바뀌면서 ‘백두산’간판을 달았다가 지난해 5월부터 ‘新(신)하로동선’ 상호로 영업중이다. 한창 점심시간 때 찾아간 ‘신하로동선’엔 빈자리가 듬성듬성했다. “저녁엔 단체·예약 손님이 많고 더러 찾아오는 정치인들이 있다”고 가게 종업원들은 말했지만, 당대의 ‘스타 정치인’들이 드나든 흔적을 증언하는 그 흔한 사진액자나 서명도 볼 수 없었다.
시간은 재촉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스스로 답하는 수다쟁이다. 한세월을 물먹고 괄시받던 이들이 ‘차기정권의 주인과 실세’로 등장하리라 상상하긴 어려웠다. ‘하로동선은 마음의 고향’이라며 나름의 의리를 지켰던 이들이 또 어떤 갈림길에서 어떻게 합치고 나뉠지는 훗날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