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애'는 '남편의 여자'와 맞닥뜨린 후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버린 여자, 미흔의 얘기를 다룹니다. 그는 인규라는 새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요. 그 사랑은 기름이 떨어져 자동차가 멈춰선 미흔을
인규가 도와주며 시작됩니다. 자동차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계속 얼빠진
사람처럼 행동하자 인규가 미흔에게 묻습니다. "괜찮아요?"
이후 뜨거워진 둘의 사랑이 알려져 궁지에 몰리자, 둘은 차를 타고
떠납니다. 그 길의 끝에서 교통사고로 파국을 맞기 전, 또다른
교통사고를 간신히 피하고나서 둘은 안부를 확인합니다. "괜찮아요?"
"예, 괜찮아요."
이와이 순지의 '러브 레터'에서 히로코는 애인 이츠키를 등반사고로
잃고 상실감에 시달립니다. 사고 지역을 찾아간 히로코는 설산(雪山) 저
멀리 이츠키 영혼을 향해 가슴 속 말을 거듭 토해냅니다. 그것은 "잘
지내시나요"를 뜻하는 "오겡키데스카"였습니다.
영화 '파이란'에서도 그랬지요. 산골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국 처녀 파이란은 위장결혼해준 건달 강재에게 편지를 계속 보냅니다.
그때 그 편지 대부분은 다름 아닌 안부를 확인하는 말들이었지요.
건배는 술을 나눠마심으로써 독이 없다는 걸 확신하기 위해, 악수는
빈손을 살펴봄으로써 서로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생겨난
고대 관습이라지요. 그때 건배와 악수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습관이었겠지요. 결국 인사란 가장 짧은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묻기
위한 과정이 예절로 굳어진 겁니다. 먹고 사는 게 힘들었던 시대에
"식사 하셨어요?"라고 묻고, 평안히 지내기 쉽잖은 세상에서
"안녕하세요?"라고 말 건네는 것은 사실 그 말들만큼 절실한 관심의
표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한가롭고 심드렁하게 들릴 지라도, 가장 절절한 말은 결국 안부를
묻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히로코는 떠나간 사람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자리에서 "잘 지내시나요"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고, 파이란은 자신의
삶을 한국과 연결해준 단 하나의 끈인 강재를 향해 거듭 안부를 전하는
말로 감사를 표시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소중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진정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면, 안부 외에 다른 그
무엇이겠습니까.
'밀애'에서 미흔과 인규의 사랑은 "괜찮아요?"라는 말로 시작하고
끝나는 셈입니다. 인규는 첫 만남에서 '괜찮냐'고 물음으로써 비로소
미흔의 삶에 '틈입'하고, 마지막 만남에서 똑같이 물음으로써 여전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이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
"괜찮아요?"라고 했을 때 아무 대답도 얻지 못했던 인규의 물음이
마지막에선 "괜찮다"는 응답을 받아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서 둘의 안부는 끝내 확인됐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이 우울한
사랑을 해피엔딩으로 읽어낼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대화였으니까요.
비록 그들의 사랑이 세상의 냉대와 교통사고로 결국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나게 되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