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길」은 여전히 유효한가―. 영국이 낳은 세계적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64)가 제창한 「제3의 길」은 구(舊)좌파와 신(新)우파의
대립을 극복하고 양쪽의 장점을 흡수한다는 논리로 영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와 클린턴 정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좌·우 대립을 뛰어넘어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기든스 학장의
영향력은 국내 지식인사회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초
그의 저서 「제3의 길과 비판자들」이 번역 출간되는가 하면,「제3의
길」과 「질주하는 세계」등 그의 주저들도 널리 읽히고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 국가 총선에서 잇따른 중도 좌파의 패배와 부시 행정부 출범은
「제3의 길」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달 22일 앤서니 기든스(64) 런던 정경대(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학장과 만나, 「제3의 길」의 진로와
세계화에 대한 대응, 축구광으로 소문난 그의 「축구 세계화론」까지
1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기든스 학장의 방은 명성과 달리 단촐했다.
런던 도심 코벤트 가든 근처의 LSE 캠퍼스 내 타워 1빌딩 11층 집무실은
조그만한 책상과 서가 2개, 그리고 너댓 사람이 앉을 만한 의자가
전부였다. 서가에는 「사회학개론」「제3의 길」등 30여개 언어로
번역됐다는 저서들이 꽂혀있고, 한국어와 일본어 번역서도 눈에 띄었다.
-- 「제3의 길」은 구(舊)좌파와 신(新)우파의 대립을
극복한다지만,「제3의 길과 비판자들」이란 책까지 나올 정도인 걸 보면,
오히려 좌·우 대립을 격화시킨 것 아닌가.
▲『내가 좌·우 대립을 격화시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좌파와 우파는
여전히 존재한다. 유럽에는 극우 세력이 부상하는가 하면, 반세계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좌파와 우파는 서로 다른 사회를
지향한다. 하지만 시장 경제와 민주적 정부는 우리가 희망하는 최선의
사회다. 전통적 사회주의가 얘기하는 계획경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당신은 중도좌파를 표방하지만, 현실주의자로 보인다. 유토피아를
않믿는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말한다면, 그렇다. 계획 경제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보듯, 현실에서 실패했다. 난 유토피아 리얼리즘을 얘기하고
싶다. 유토피아는 현실적인 정책과 연결돼야한다. 유토피아가 현실과
멀어지면, 좌파 혹은 우파의 포퓰리즘(민중주의)에 휩쓸리게 된다.』
-- 토니 블레어 총리는 9·11 이후 대테러 정책에서 미국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제3의 길을 채택한 영국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별로
다를게 없는 것같다. 제3의 길은 대외정책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제3의 길은 원래 중도 좌파의 정책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외정책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다. 부시 행정부는 왜 군사적 선제 공격을
고집하는가. 사담 후세인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우든지, 국제 기구를
통한 압력을 행사하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미국과 유럽의 이견을 중재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당신은 토니 블레어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그와 자주
만나는가. 토니 블레어가 당신에게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 적은
없는가.
▲『난 토니 블레어의 고문이 아니다. 내 본업은 LSE 학장이고, 난 학자다.
몇년전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의 신노동당 네트워크에 관여했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만 위해 일한 게 아니라, 브라질, 독일 등 유럽과 전
세계 정부의 신노동당 정책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는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무슨 자리를 제의받은 적은
없다.』
-- 한국의 지식인들은 정권 비판은 즐기지만,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지식인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현실 정치에 개입, 지식인의 독립성을 훼손시켰다는 비난은 나에게도
쏟아진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공적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인들이 정치적 참여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컨대,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혁신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과학자의 경우, 지구 온난화나 생명 공학처럼 과학기술 발전이 몰고올
결과에 대한 공적(公的) 토론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 얼마전에는 LSE 출신인 조지 소로스와 함께 학교에서 공개 대담을
나눴다. 소로스는 투기 자본주의의 전사라고 비난받는 인물인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소로스는 러시아와 동유럽 재건을 위해
자본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어떻게 이 세계에 공평을 실현할 것인지,
금융 시장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어떻게
가동시킬 것인지…. 여러 분야에서 난 그와 생각이 같다.』
-- 당신은 '제3의 길 시각'(The Third Way Perspective)이 세계화에
긍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국(富國)과
빈국(貧國)의 불평등 심화 같은 세계화의 부정적 요소에 눈을 감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있다.
▲『세계은행(IBRD) 부총재를 지낸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에 나온 그의 책 '세계화와 그 불만들'(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구조 조정과 제도
변화,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 국가로, 다른 저개발국의 모범이 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성장에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보호정책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나도 스티글리츠에 동의한다. 대부분 저개발국의 빈곤은 국가가
운영하는 비효율적인 시장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부패와 무능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구조 개혁을 저해한다. 단순히 재분배만 가지고는
저개발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세계화 흐름속에서도 국가 이익을 둘러싼 국민국가간의 대립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위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세계화에 따라 국민국가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국민국가가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 형태는 많이 바뀔
것이다. 세계화의 영향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권력 분산과 탈중앙화
압력이 강해질 것이다. 세계화된 시장앞에서는 케인즈식 계획 경제를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국적 경제 기구의 역할이 중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국가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도다. 초국적
기업이라 할지라도 국민 국가의 법규제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 당신은 당신 집안에서 가장 먼저 대학에 간 사람이라고 들었다.
보수당인 존 메이저 전 총리의 가정 환경과 비슷한 것같다. 서민
출신이라는 배경이 현재의 당신을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
▲『메이저 총리 아버지는 서커스 곡예사였다. 내 아버지는 런던 지하철
공사 직원이었다. 내가 자랄 때에는 대학 진학률이 7%에 불과해 대학에
가는 게 드물었다. 대학에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된 것은 출신 배경과는
많이 다르다. 난, 런던 교외에서 자랐는데 거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싫었다. 코스모폴리탄적인 런던 시내로 들어와 살고
싶었다. 지금은 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 당신은 열렬한 축구 팬이라고 들었다. 월드컵이 얼마전 한국에서
열렸는데, 축구가 문화적 측면에서 세계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가.
▲『난 런던의 토튼햄 핫스퍼(Tottenham Hotspur·영국 프리미어 리그
명문구단)팀 팬이다. 2주에 한번씩 팀이 홈 경기를 할 때마다 축구장에
빠뜨리지 않고 간다. 아얘 시즌 티켓을 끊었다. 축구는 세계화에
기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화의 일부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경기를 계기로 세계 25억 인구가 한국의 거리를 지켜봤다. 이것만큼
세계화를 잘보여주는 사례가 있는가.』
▷▶요즘 기든스는… “너무 바빠 책쓸 시간도 없다”
런던 정경대(LSE) 앤서니 기든스 학장은 올초 '신노동당은
어디로'(Where Now for New Labour)란 책을 냈다. 영국 노동당 정부의
진로를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지난 달에는 런던 정경대에서 조지
소로스와 공개대담을 가졌고, '세계화-선인가 악인가'를 주제로
공개토론을 갖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지난달 21일 LSE에서 열린
세계화 공개토론에는 1400여명이 넘는 학생·시민들이 몰려, 대중적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는 "요즘도 많을 때는 매주 서너차례 강연을
다닌다"고 했다.
기든스 학장은 인터뷰 직후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은 어떻게 됐느냐"며
한국 정세에 관심을 보였다. 1994년과 1998년, 2001년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기든스 학장은 김대중 대통령 과 '제3의 길'을 놓고 토론을
벌인 적 다. 새로운 집필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사회민주주의와
유럽의 미래 등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학교 일이 너무 바빠서 책을
쓸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 주요 경력
▲1938년 런던 출생
▲헐 대학 사회학과 졸업, 런던 정경대 석사, 케임브리지대 박사
▲경력: 케임브리지대 교수. 런던 정경대 학장(현). 학술서적 전문
'폴리티'(Polity) 출판사 공동창업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이념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음.
▲주요 저작:「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1971)「좌파와 우파를
넘어서」(1994) 「성찰적 현대화」(1995) 「제3의길」(1998) 등 3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