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평정했으니 이제 상대는 일본이다." 시청률 50%를 넘는 폭발적
인기로 화제인 SBS '야인시대'. 지난 15일 김두한이 구마적을 꺾고
종로의 주인이 되느라 회오리를 몰아친 이 드라마가 '애국심'을 코드로
전반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서울의 '오야붕' 김두한(안재모),
냉철한 야쿠자 두목 하야시(이창훈), 일본 전국유도대회 챔피언
마루오까(최재성). 연말까지 '야인시대'는 세 사나이가 종로를 놓고
벌이는 한판 대결로 전반 50부의 대미를 장식한다. 내년 1월 시작될 후반
50부에선 김영철이 김두한 역을 바통터치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야인시대' 열풍을 이끌 세 남자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일까?
◆김두한―고뇌하는 주먹
현실의 김두한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한글을 잘 읽고 쓰지 못했다"는
것이 이환경 작가의 말. 하지만 '야인시대' 김두한은 '인텔리'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빠른 판단으로 상황에 대처하고, 눈빛은 항상
고뇌에 차있다. 곱상한 '신세대 김두한'은 젊은 시청자들을 흡인하는
성공 포인트가 됐다. 안재모는 "내 모습이 현실의 김두한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호방한 보스의 모습보다 일제에 대해 뼛 속
깊이 사무친 한을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재모는
안정된 연기로 자칫 어설플 수 있는 '지성적 김두한'을 잘 소화해냈다.
말 끝을 가라앉히는 독특한 말투는 그가 기울인 노력을 엿보게 한다. 이
작가는 "거인다운 풍모는 부족하지만, '젠틀'한 김두한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야시―정정당당한 보스
김두한과 팽팽히 대결하는 하야시는 주인공 반대편에 있지만,
'악역'으로 단정짓기는 힘들다. 냉혹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야비한 '야쿠자 보스'의 전형. 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합리적이고 정정당당한 '리더'다. 하야시는 29일 방송에서 김두한에게
총을 쏜 왕발이 자신을 받아달라고 부탁하자 "나는 의를 생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거절한다. 이 작가는 "실존 인물 하야시는
김두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지녔었고, 깨끗한 신사였다"고
말했다. 선한 눈매를 지닌 이창훈의 하야시 역도 '안재모-김두한'
만큼이나 파격. 하지만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악역 아닌 악역'
하야시를 잘 소화해 인기몰이에 톡톡이 한몫한다. 이창훈은 "하야시가
원래 한국인이라 종로 주먹들에게 잔인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마루오카―의리의 사나이
마루오까는 11월11일부터 등장해 분위기를 쇄신할 전반 클라이맥스의
'조커'다. 하야시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서 건너온 그는
전국유도대회에서 우승한 괴력을 지닌 경찰. 김두한과 싸워 승리한 뒤
종로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만 두번째 결투에서 패배하자 김두한의 유일한
일본인 친구가 되는 풍운아다. 숱한 위기에서 김두한을 구하는 주역답게
중량급 최재성이 맡았다. 장형일 PD는 "본인이 불만스러워할 정도로
대사를 적게 줄 생각"이라며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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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자가 본 '야인시대'-- 단순 명쾌한 남성상에 끌려 지나친 폭력 청소년 악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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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깡패'들의 주먹·발길질 하나 하나에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눈길이 멈춘다. '야인시대'가 방송되는 월·화요일 저녁엔 직장인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초등학교에선 '긴또깡'을 모르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지하철역 TV 앞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틀림없이
'야인시대' 시간이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중절모, 바바리 코트 등
'야인시대 패션'도 인기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같은 '야인시대' 열풍의 원인을 여럿 꼽는다.
그중 첫째는 '단순함'이다. '야인시대'의 인간관계는 단선적이다.
보스와 부하의 수직적 관계가 거의 전부다. 숱한 사람과 공식·비공식
관계를 맺고 눈치보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단순명료한 인간관계는
동경의 대상이다.
단 한번의 결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극중 현실은 쾌감을 안겨준다.
구마적, 신마적, 쌍칼…. '야인시대'에 나오는 주먹들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온갖 복마전 속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사회 지도층, 권력을 따라 떠도는 '철새 정치인'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추악한 현실 정치에 대한 염증과 무력감이 시청자들을
'야인시대'로 끌어모은다는 분석이다. '야인시대'는 또한 잊혀져가는
'남성성'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자들은 '야인시대' 속의 지나친 폭력성과 폭력의
미화가 대중적인 환호에 파묻혀버리는 점에 대해선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유치원생·초등학생부터 청소년들까지 이런 폭력성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서울대 심리학과 김명언 교수는 "TV의 폭력 장면이 어린이의 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며 "방송사는 명확한
시청연령 등급을 매기고, 부모들도 자녀의 시청지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