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15일 개봉)는 이창동 감독 영화의 새로운 도전이다. 감독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 모습을 우리 앞에
들이밀지만, '오아시스'의 주인공들은 '초록물고기'처럼 암흑가
발톱에 할퀴어 스러지지도 않고, '박하사탕'처럼 격동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찢기다 목숨을 끊지도 않는다. 감독은 보편적인 한국의 진실
대신, 전과자와 장애여성이라는 매우 '특수한' 남녀의, 남루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꺼낸다. 그 영화는 단순한 멜로를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은 과연 뿌리내려 살만한 토양인가, 이 메마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간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하기는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전과 3범이 되어 갓 출소한 종두(설경구)는 사고 피해자 가족집에
사과하러 갔다가 방에서 늘 라디오나 듣고 사는 전신마비 장애여성
공주(문소리)를 본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종두는 공주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자신과 똑같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영혼에 대한
애정 같은 것. 공주에게 그의 사랑은 무척 낯설었지만 곡절끝에 둘은
'세상이 아무도 사랑이라고 알아주지 않는'사랑을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는 일단 극적인 멜로다.
이 때부터 시작되는 이들의 '데이트'는 관객들 머리와 가슴을 사정없이
흔들며 사랑의 본질, 세상의 황량함을 되묻게 만든다."무슨색 좋아?"
"난 흰색…" 긴 호흡의 말도 못하고 다양한 표정도 몸짓도 짓지 못하는
공주는 단지 몇 음절 외마디로 마음을 전한다. 인간끼리의 소통에서
거추장스런 장식과 허울을 다 걷어낸 알맹이만의 소통은 역설적으로
소통의 본질, 사랑의 본질을 더 간절하게 드러내 가슴을 울린다. 비명
같은 외마디가 사랑의 밀어로 들리고, 공주의 씻지 않은 발에 하는
전과자의 키스가 더 간절하고 사랑스런 애무로 느껴지게 만든건 감독의
힘이고 영화의 힘이다. 그 절박한 외마디 소통은 어느 늦은 밤 데이트를
마친뒤 한공주의 방을 나서려던 전과자에게 한공주가 외치는 "같이
자!"에서 절정에 이른다. 관객은 웃는다. 그 웃음은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삶의 가장 처절하고 씁쓸한 순간에도 끼여드는 악마 같은
웃음이다. 두 연인의 정사를 강간으로 오해한 한공주 오빠의 신고로
전과자가 다시 체포되면서 시작되는 소통의 파탄상태는 재미를 넘어 의미
심장하다. "그사람 잘못없다"는 한공주의 의사표현이 피해자의 절규로
오해되는 뒤틀린 상황은 세상의 소통이 얼마나 왜곡될수 있는가에 관한
알레고리의 경지까지 간다.
이창동 감독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 대신, 필요하면
장애여성이 일반인처럼 돌아오고, 인도 코끼리가 방안에 들어오는
판타지도 섞어가는 새로운 화법으로 뒤틀린 세상풍경을 더 리얼하고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뒤틀린 세상에 대해 끝내 폭발로 맞서지 않는다. 거친 세상이지만
힘내서, 견뎌가며 살만 하지 않는가 말하는 이 영화에서 이창동 영화의
변화가 느껴진다. 라스트 신, 감옥에서 보내온 종두의 편지를 공주가
읽을 때,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