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교인,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데 바치며
한국 사회와 개신교에 큰 영향을 미쳤던 벽안(碧眼)의 성공회 노신부가
영면했다.
개신교 수도공동체 '예수원' 설립자인 대천덕(戴天德·84·본명 루벤
아처 토리) 신부가 6일 오전 7시40분 별세했다. 대 신부는 지난 1965년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세운 후 40년 동안 개신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며
평생을 청빈과 나눔으로 일관한 '살아있는 성자(聖者)'였다.
7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예수원은 하루 세 번의 기도와 묵상·대화·독서
등으로 영성을 키워나가고 목장과 목각 등 공동 노동을 통해 자급 생활을
하고 있다. 회원뿐 아니라 매년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2박3일 동안
이곳을 찾아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대 신부의 설교를
들으며 삶의 방향을 잡아왔다. 또 대 신부는 매일처럼 날아드는 상담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면서 정신적 스승의 역할도 해왔다.
1918년 중국 산둥성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대천덕
신부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할아버지가 설립한 무디 성경학교와 하버드대·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등에서 공부하고 1946년 성공회 신부가 됐다. 10년 넘게 일선
목회에 종사한 후 1957년 한국으로 돌아와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
신학원 원장을 맡았던 그는 보다 근본적인 삶을 위해 해발 920m의 산골로
들어갔다.
대천덕 신부는 자신을 따라온 12명의 노동자·농부들과 함께 예수원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깃불도 없는 오지에서 커다란 군대용 텐트를 치고
며칠씩 호박을 먹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예수원은 점차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수도원으로 자리잡았다.
대천덕 신부는 개인적 영성뿐 아니라 이를 사회정의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노력했다. 그는 토지정의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노동세를 폐지하고
토지세를 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족으로는 화가인 부인 현재인(玄在仁·제인 그레이 토리·80)씨와
1남2녀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에 마련됐다. 10일
오전 9시 성공회서울대성당에서 발인 예배를 가지며 벽제에서 화장한 후
예수원에 묻히게 된다. (02) 362-3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