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에서 틈만 나면 베고니아 화분을 매만지는 킬러 레옹.


에릭 세라의 촉촉한 선율을 바탕에 깔면서, 고독한 킬러의 쓸쓸한 운명과
사랑을 멋지게 그려낸 뤽 베송의 '레옹'에서 레옹(장 레노)이 가장
아끼는 물건은? 이탈리아제 베레타M92F 권총도 아니고, 핀랜드제
저격총도 아니다. 진초록 잎사귀가 사방으로 퍼진 베고니아(Begonia)화분
한 개다. 레옹의 일과는 베고니아 화분을 햇빛 잘 드는 창가에 옮겨다
놓는 것으로 시작해, 저녁이면 화분을 집안으로 옮기는 것으로 끝난다.
틈만 나면 체조하고 잠잘 때도 한쪽 눈은 깨어있는 '프로'의 몸가짐과,
글도 못읽고 우유만 마시는 어린애같은 천진함을 겸비한 레옹의 신비한
이미지를 빚는데도 이 화분은 톡톡히 일조한다.

레옹은 화분을 거의 '애완식물'처럼 사랑한다. 일가족이 부패 경관
일당에게 몰살당하자 '복수하게 도와달라'며 레옹의 품으로 뛰어든
당돌한 소녀 마틸다조차 시샘을 할 만큼.

레옹에게 베고니아는 뭘까. 어느날 마틸다가 샐쭉한 표정으로 "화분이
그렇게 좋아요?"라 물었을 때 레옹이 답했다. "제일 친한 내 친구지.
늘 밝고, 귀찮은 질문 따위 해대지 않고…. 뿌리가 뽑힌 것도 나랑
비슷해…"

대지에 뿌리 박지 못한채 화분에 담겨 떠도는 베고니아에게서 레옹은
자신의 운명을 읽었고, 분신처럼 여겼다. 베고니아 잎을 넋나간듯
바라보며 물주던 레옹에게 17살 소녀 마틸다가 "레옹! 물은 내게 주는
거예요, 자라게…"라고 뱉은 말은 끈적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깜찍했던
명대사다. 마틸다의 복수를 해 주려다 생사를 넘나들던 레옹은
라스트에서 200여명의 경찰특공대 병력에게 사방을 포위당한다. 마침내
도저히 살아서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레옹은 가장
사랑하는 둘만을 밖으로 탈출시킨다. 마틸다와 베고니아다. 영원한
이별의 순간, 레옹은 가슴에 남겨뒀던 한 마디를 소녀에게 건넨다.
"아이 러브 유… 마틸다" 마틸다가 울면서 답한다. "저두요, 레옹…"
이 대화를 끝으로 떠돌이 레옹은 세상을 떠나지만 레옹과 함께 세상을
떠돌던 베고니아는 옮겨 심어져 대지에 뿌리를 내린다. 그를 너무
사랑했던 마틸다의 손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