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시절의 일이다. 한참 채팅에 빠져 하루 5시간 이상씩 동호회
대화방들을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오타(誤打)가 무척 심한 편이었다.
어느날 미술 동호회 대화방에서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임인석'이란
상대를 만나 둘 만의 대화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잠수에
빠졌다. 나로선 역시 오타 투성이 채팅이었다. 그러나 상대편은 거의
오타가 없는 수준급 타이핑 실력과 해박한 미술지식을 자랑했다. 그러던
중 "최금수님 오타가 너무 심하군요. 혹시 발로 타이핑하시나요?"라고
물어왔다. 농담 삼아 "너무 엉망이지요? 앞으로는 손으로 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나도 발로 타이핑하는데
최금수님 정말 발로 타이핑 해요?"라고 되물어 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 농담이어요. 근데 임인석님은 발로 타이핑하는가요?"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정말 발로 타이핑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임인석님은 손이 마비되거나 없는 장애인들이 입이나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협회 회원이었다.
몇 년 후 내가 큐레이터로 근무하던 미술관에서 장애인 미술전이 있었다.
개막 날 너무 반갑게 임인석님을 만났다. 뇌성마비여서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니까 그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막상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은 채팅 때
이야기하던 그의 고민이나 구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기금마련을
위해 팔릴 수 있는 예쁜 작품만 출품했다"며 "언젠가 장애인이 아닌
작가로서 전시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나 또한 '구족화가
임인석님'이 아닌 '화가 임인석님'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최금수·네오룩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