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의 명문가들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하였다.
영남의 명문가들은 강직과 청렴에 관한 일화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호남의 명문가들은 적선(積善)과 분배에 관한 미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향이 그것이다. 강직과 청렴은 벼슬을 하는 권력자가 지녀야할
덕목이고, 적선과 분배는 재물이 많은 부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부자가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무조건 내 앞에 큰 감 놓고 보는'
탐욕과 인색 때문이고, 부의 집중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공동체에 대한
재물의 분배와 적선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의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국)의
터에 자리잡은 강진 김씨 고택인 소고당(紹古堂). 이 집안에서
보여주었던 적선과 분배의 미담은 오늘날까지 전북지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소설 '토지'의 무대가 평사리이듯이, '평사리'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곳은 대체적으로 넓은 들판이 있기 마련이고, 들판이 넓으면
비례해서 부자도 많다. 강진 김씨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양주목사
김약묵(金若默·1500~1558) 이래로 이 지역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던
향반(鄕班)이면서 부자였다. 현재 소고당의 주인이자 장손인
김환재(金煥在·82)씨의 고조부인 김기혁(金驥赫)은 별명이 '밥 님'
'돈 님'이었다. 밥과 돈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님'자를 붙인
것이다. 길에 가다가도 나락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면 주어서 도포자락에
넣었다. 길에서 개똥 소똥을 발견하면 집어다가 남의 논에 거름되라고
넣어주곤 하였다. 그렇게 절약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증조부 김태흠(金泰欽)도 역시
천석군이었지만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아낌없이 쌀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집안의 가풍은 다름 아닌 적선이었던 것이다.
조부인 김영채(金永采:1883-1971)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였지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최선을 다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8(戊辰),
1929(己巳)년은 이 지역에서 '무기(戊己) 대흉년'으로 일컬어지는
대단한 흉년이었다. 2년 연속 흉년이 들다 보니까 당장 먹을 양식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세금이었다. 그 지역 산외면 면민들은
호세(戶稅)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데모라도 해서 세금을 경감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살벌한 왜정 치하라서 데모는 커녕 진정서도 쉽게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영채는 산외면 면민들의 전체 호세를 대신
내주었다. 이 지역의 어른이고 부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를 고맙게 여긴 면민들이
'산고해심'(山高海深)과 같은 은혜라고 칭송하면서 현 칠보면 지서
자리에 시혜비를 건립하였다. 시혜비가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영채는 "보기에 민망하다. 산 사람 비문을 세우는 법이 아니다.
철거해서 땅속에 묻어달라"고 지역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그
비문은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그가 죽은 해인 1971년에야 비로소 다시
꺼내어 세워지게 되었다. 김영채는 자기 스승이자 의병장이었던
김영상(金永相·1836~1911)의 가족 생계를 평생동안 책임지기도 하였다.
김영상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병합 후에는 일제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군산 형무소로 이송되던 중 만경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분이다. 그 분의
가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논과 밭을 사주면서 호구지책을 삼도록
하였고, 일제 감시에 시달리자 보호막 역할을 자청하였다. 비록 일선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이선에서 해야 할 도리는 했던 셈이다.
부친인 김윤술(金允述·1903~1958)도 역시 집안에 내려오는 적선의
가풍을 이어갔다. 정읍시 칠보면에는 일제 말기에 섬진강 상류의 물을
막아서 건설한 칠보발전소가 있다. 당시 1만5000㎾의 발전용량을 가진
수력발전소로서 건립연대만으로 따지면 남한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발전소였다. 그러나 이 발전소의 전기는 외부로 송출되었기 때문에 정작
그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은 전기 혜택을 볼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윤술은 "발전소 옆에 사는 사람들이 호롱불만 키고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면서 전기시설에 드는 비용 일체를 부담하였다. 논
100마지기, 즉 2만평의 사재를 내 놓았던 것이다. 그때가 해방 다음해인
1946년이다.
평사리에 자리잡은 대지 2,000평에 50칸 규모의 고택 당호는
소고당(紹古堂)이다. 소고당의 뜻은 '옛것을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소고당의 바깥 주인인 김환재씨에게 있어서 소고란 "대대로 집안에
내려오는 집안의 가풍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일제시대 중앙고보와 평양 대동공전을 나온 인텔리였지만 그가 평생
주력한 일은 고향에 있는 서원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을 관리하고
뒷바라지 한 일이었다. 이제 과거와 같이 천석의 부자는 아니지만 집안의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그마한 실천을 하고 있다. 그 실천
방법은 장학금. 1982년부터 정읍군 산외면, 칠보면, 산내면의 3개 면에
있는 중학교 한 곳씩을 골라 각각 매년 쌀 한가마니를 보내고 있다.
햇수로는 올해로 22년째이다. 드러내 놓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금액이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덕망가 집안의 후손으로서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고당의 안주인이자 우리나라 규방가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여류시인인 고단(高▩,80세)여사도 남편의 실천에 적극 동조한다.
"내 친정이 제봉 고경명 선생 집안인데, 하인들이 몰래 쌀을 퍼가고
김치를 퍼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어른들은 일부러 모른 체 하였다.
가난한 집안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나도
나중에 꼭 장학금을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집와서 보니
시가집도 덕망가였다." 소고당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환재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돈만 많고 법도는 모르는 졸부를 옛 어른들은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 '부한'(富漢)이라고 했지. '부자 상놈'이라는
뜻이야. " ( 趙龍憲·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다음 편은 겸양의 미덕을 실천한 안동의 유운용(柳雲龍)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