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으로 분장하는 이른바 ‘코스프레 ’는 일본 오타쿠 문화의 대표적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오타쿠 가상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 송지수 옮김 / 문학과 지성사 / 1만2000원

일본 아니메송(만화주제가)의 프린스로 불리우는 카게야마 히로노부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드래곤 볼 Z'의 주제가 'CHA-LA
HEAD-CHA-LA'를 오리지널 그대로인 일본어로 불렀는데, 놀랍게도
공연장에 운집한 1000여명의 유럽인들이 함께 '드래곤 볼 Z'의
주제가를 일본어로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국내에선 단편적인 해외 토픽으로 지나쳐 버릴지도 모를 이 공연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세계를 동시대의 문화권으로
링크시키고 있는 일본산 '아니메'의 파급력과 함께 전혀 다른 언어
체계의 주제가 가사를 외우고 따라 부르는 집요한 마니아군의 존재를
유럽에서까지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광적인 마니아를 상징하는 단어로 국내에서도 종종
인용되고 있는 '오타쿠' 문화는 이처럼 국적과 이념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취미 생활의 연장이 아닌
완벽한 자기 소유화를 통해 일반인들이 넘기 힘든 특수 전문 영역에까지
진입하는 이들의 문화는, 다시 이것을 동경하는 또 다른 문화권의 오타쿠
인종들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의 저자 에티엔 바랄은 오타쿠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직접 오타쿠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오타쿠를 피사체로 기술한 일련의 서적들과는 다른 포괄적 접근을 시도
한다. 가령 만화나 애니메이션 정도에 한정지어 해석하고 있는 오타쿠의
범위를 보다 광범위하게 조준하여 SF 오타쿠, 인형 오타쿠, 아이돌
오타쿠, 밀리터리 오타쿠, 스포츠기록 오타쿠, 다이어트 오타쿠,
심지어는 각종 사고 현장의 뉴스 자료만 모으는 대참사 오타쿠에
이르기까지 오타쿠 사회에 매복 중인 다양한 오타쿠들의 존재를 공식화
시키고, 나아가 이들이 과연 사회 구성원으로서 부적격한 지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일본 사회에서 오타쿠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선입견은, 1989년 7월 23일 검거된 오타쿠 연쇄 살인마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 이후 '오타쿠들은 모두 잠재적인 변태 살인마'처럼 낙인
되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같은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일본의 오타쿠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에티엔 바랄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상 세계의 아이들'
중엔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의 꿈을 정당하게 성취해낸
입지전적인 오타쿠들도 포함되어 있다. 오타쿠 세계의 완성형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는 GAINAX의 창립 멤버 오카다 토시오,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겔리온의 감독), 아카이 타카미(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의 창안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GAINAX의
설립자이기도 한 오타쿠의 왕 오카다 토시오는 일본 엘리트의 요람 도쿄
대학에 오타쿠학 강좌를 개설해 오타쿠 문화를 학문의 위치에까지
올려놓기도 했다.

제3자(프랑스인)의 시각으로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직접 취재 집필한
저자는 오타쿠 현상의 출현에서부터 진화, 분열의 단계들을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나아가 오타쿠들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어떤
형태로 충전될 수 있을지 조망해 보고 있다.

( 송락현·써드아이 출판기획국 편집장·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