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욱의 '건곤불이기'(마술램프·전5권)는 무협 판타지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크로스오버는 아니고 오롯한 무협이다. 차라리 신무협에 가까운
작품인데, 여기서 신무협이란 신간이라는 의미로 '신'을 머리에 붙인
용어가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무협의 특정한 경향을 이른다.
황당무계함을 경계하고 인간의 성장이나 사실적인 풍속 묘사에 천착하는
것이 신무협적 사조의 경향인데, 덕분에 대체로 글에 무게가 있지만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일장일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임준욱의 글은 신무협적인 무게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이
빡빡하지 않다. 그의 글맛은 아주 순하다. 복수와 음모와 패권다툼과
구도자적인 결투까지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정조는 범부의
눈높이에 맞춰진 온후함이다.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인 '건곤불이기'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 본연의 세계와 궁합이 잘 맞는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있다.
'건곤불이기'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대구들이 존재한다. 부자들의 거리와 빈민들의 거리, 평범한
요리사 집안의 아들과 흑도를 주름잡는 방파 두목의 말괄량이 딸, 하늘을
나는 강호의 고수들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범부의 인생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요리사의 아들이 무림고수가 되는 성장담인 동시에, 어린
아들이 평범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그야말로 초지일관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늘어놓아 두 이질적인 세계가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사건은 한참이나 뒤로
가야 일어나고 덕분에 마무리 역시 진둥한둥 맺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토록 정직하고 온후한 방식 때문에
순하게 읽히는 맛이 살아난 셈이기도 하니, 전적으로 틀린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날 듯 만나지 않고 스쳐가는 고수와 범부의 세계를
구경하는 재미도 적지는 않은 편이니까.
자극적인 아이디어나 현란한 기교의 미디어들에 지쳤을 때,
'건곤불이기'는 온화한 조강지처의 무릎을 베고 누운 듯한 독서를
누리게 해주는 책이다.
( 우지연·소설가·http://mars.murimpi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