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칠순을 맞은 1999년, 고신호 아저씨가 세상을 떴다. 한 동네 살며
형처럼 따르던 내 아버지가 월남하자 덩달아 내려왔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동향분이셨다. 내 나이 열셋에 돌아가신 젊은 아버지가 어떤
청춘을 보냈는지 난 아저씨를 통해 듣곤 했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연줄도 같이 끊어져 너울너울 사라지는 것 같아
맥이 풀리고 심통이 났다.
엄마는 차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 장례는 어떻게 해드려?" 내가
물었다. "글쎄다. 나는 노래 좋아하니까, 노래나 많이 틀어줘." "어떤
거?" "니가 잘 알잖니? 가고파, 그네, 향수, 그리고 찬송가를 계속계속
틀어줘."
나 어릴 적 엄마의 노래솜씨는 일품이셨다. 언제나 서슴 없으셨다.
사람들이 청하면 마다않고 일어나 지긋이 눈감고 노래했고, 사람들이
"재창이요!" 외치면 양껏 몇곡 더 부르고 앉으셨다. 성악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외할아버지가 반대했고, 결혼해 노래 공부시켜주겠노라던
삼팔따라지 아버지와 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전쟁이 났고, 환도수복
후엔 나와 두 여동생이 차례로 생겼다. 그렇게 꿈은 꺽였지만 엄마
가슴엔 항상 노래가 있었다.
나는 집안 살림을 돕느라 열아홉살 어릴 적부터 세상으로 나와 노래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꿈 많은 나이에 하고픈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가슴앓이하며 일에 끌려다니느라 건강을 상했고 마음도
거칠어졌다. 그런 딸을 지켜보며 엄마는 당신의 노래를 잃어버리셨다.
어느날부턴가 노래를 안하셨다. 당신 목소리를 그대로 닮은 딸의
잃어버린 꿈 때문에 입 밖으로 노래를 내놓지 못하겠노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했단다.
내 기억 속 엄마의 노래는 레퍼터리가 찬란하여 한 곡을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영화면 영화, 노래면 노래, 그림이면 그림, 바느질이면 바느질,
젊은 날의 엄마는 참 많은 설렘을 품고 사셨던 것 같다. 예술가로서의
근성과 눈썰미와 손재주와 목소리도 두루 갖췄지만, 결국 세상에서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셨다.
지금도 나는 어린 날 엄마 목소리로 들은 가곡 '가고파'의 그 느낌, 그
호흡, 노랫말 사이사이 배어나던 감정을 또렷히 기억한다. '내에 고히양
남쪽 빠다~ 그 파라안 무울 누네 어리네~ 꾸음엔드을 잊으리오오~ 그
잔자나안 고오히앙 빠다~"
나는 안다. 세상의 고수들은 다 묻혀있다는 것을. 외려 무대 위에
서는 이들의 수를 읽는 분들은 다 객석에 앉아계시다는 것을. 울엄마의
노래가 그랬다. 그 못이룬 꿈들이 운명처럼 나를 몰아갔고, 때문에 날이
가고 노래를 알수록 점점 자신만만하게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 양희은·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