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에 의해
납치돼 3년간 유폐됐을 당시 가족과 친지에게 보낸 편지 10여통이 본지에
단독입수됐다. 대원군 친서는 가로 7~11㎝, 세로 22~25㎝의 한지와
분홍색 종이에 휘갈겨쓴 쪽지편지로, 노정객 대원군의 기개와 처연한
심경을 함께 담았다. 몇몇 편지는 뒷면에도 글씨를 적었고, 2㎝ 크기가
될때까지 여러차례 접어 비밀리에 보낸 흔적까지 남아있다.
유배초기인 1882년 가족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8월14일자 편지에는
"천진에서 안치 공문을 봤다. 그 지시에 따라 보정부로
향할 것인데, 언제가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어느 곳에 가든지 내
마음에는 번뇌가 없다. 집안 일과 자식교육은 조금도 소홀히 하지말라.
대저 팔자소관이다"라고 적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속에서도
태연함을 잃지않은 대원군의 기개가 엿보인다.
비슷한 시기 또다른 편지에는 "내 망건 하나와 평소에 쓰는 망건
너댓개를 사서 보내고, 간장도 많이 보내거라. 오후에는 보정부에 갈 것
같다"고 적어 대원군이 의식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궁색한 처지에
빠진 것을 알 수있다. 대원군은 "지금은 조각편지들이 밖으로 통하지만,
다시는 한마디 말이나 글자 한자도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대원군이 중국을 다녀온 후 만년에 쓴 글에는 한창 때의 그답지않게
신세한탄하는 내용도 있다. "내 나이 칠십에 긴 밤을 당해 음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물며 팔십을 바라보는 때에 있어서랴. 낙죽
한그릇 밖에 없구나."
1882년7월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몰려 청나라에 끌려간 대원군은 천진에서
당시 청나라의 실력자인 이홍장의 심문을 받은 후, 보정부에 안치됐다가
1885년 2월 원세개와 함께 귀국했다. 대원군의 중국 유폐 행적은 천진에
도착한 1882년7월19일부터 10여일간의 상황을 대원군이 차후에 작성한
비망록 정도만 공개됐을 뿐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