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고, 나는 맹세코
명치(일본) 치하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9월4일 칼에 엎드려 죽노라."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를 비통해 하며 순국자결한 소송
정재건 선생의 뜻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진다. 유림과 친족 등
각계인사들로 구성된 소송선생 묘비제막식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창규
성균관장)는 2일 오전11시 곡성군 옥과면 설옥리 괘일산록에서 기세훈 전
광주고법원장과 유림, 친족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묘비제막식(입비식)을 갖는다. 행사직후에는 생가를 방문해 순국정신을
되새긴다.
지난 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나 후손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묘소에 비석도 세우지 못하자 곡성군이 지원해 비석을 세우게 됐다.
증손이 살고 있는 생가(곡성군 입면 약천리)에는 과거 급제 어사화와
각종 교지, 자결 당시 사용됐던 단도 등이 남아 있다.
1843년 출생한 선생은 10년간의 성균관 유학을 거쳐 문과급제,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됐다. 1894년 강화도조약 이후 외국간섭의
배격과 공직문란 등을 통탄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수차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을미사변 이후 1896년 장성지역 의병궐기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