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메이션을 문화로 승화시킨 ‘만화 영화의 신’##


일본 애니메이션을 '문화'라고 부르게 만든 장본인. 그가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이다. 97년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원령공주'(もののけ姬)는
일본 영화-애니메이션을 통틀어 사상 최고 기록인 135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흥행수익은 113억엔 (약 1200억원).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
의 신'으로 등극했다. 어떤 정치인이나 경제인에게도 붙여주지 않는
'국민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 만으로 우리는 그의 파워를
체감한다. 일본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말할 때 첫손 꼽는,
'미야자키 표 애니메이션'의 브랜드 파워는 대체 어디에서 샘솟기
시작했을까.

궁금증을 안고 미야자키 왕국의 문을 두드리기 전, 나는 '원령공주'의
제작 과정을 담은 메이킹 비디오를 보다가 미야자키의 육성을 듣고
멍해졌다. 신이라 생각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신을 '영화의
노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 만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영화의 부하가 돼 버리고,
나중엔 영화에 지배되는 노예가 돼 버린다" 라고. 아! 이 취재는 정말
재미있겠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왕국인 스튜디오 지부리(スタジオジブリ)는 도쿄
신주쿠에서 중앙선 전철로 30분쯤 걸리는 코가네이시에 자리잡고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올여름 개봉작 마감에 너무 아슬아슬 쫓기고 있어
못 만난 대신, 지부리의 사업본부장인 스즈키 토시오씨를
인터뷰했다. TV에서 몇번이나 본 명프로듀서다. 미야자키의 대표작에
참여한 이 프러듀서는 미야자키의 창작 스타일을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듭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마디로 "주변의
영화 비즈니스 관계자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늘 뛰어넘어
스폰서들을 경악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붉은 돼지'(홍の돈)를
만들 때도 그랬다. 비행가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라 스폰서로 JAL과
접촉하는데, 돼지가 주인공이라고 하니 항공사는 아연했단다. 왠 돼지?
일본에서도 돼지는 지저분한 동물이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그렇게 하고
싶으면 20분 짜리 단편으로나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단다.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는 미야자키의 고집덕에 결국은 1시간 반짜리 극장용으로 완성.
결과는? 애니메이션 역사가 다시 씌어졌다. '재미있는 어른용
애니메이션'의 탄생! 이걸 계기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어린애들
오락'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것이 되었다.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때도 주위가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엣? 오바께(귀신)라구? 거기다 무대는 빈곤하기 짝이 없는 50년대 전쟁
직후 시대라니…" 이건 바로 전에 그가 보여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섬 라퓨타'같은 쌈빡한 히트작들과도 너무 틀린다. 제작자들이
처음엔 모두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 팬더와 고양이를 합친 것 같은
토토로라는 괴물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 작품은 자연, 특히 나무와 풀의
아름다움을 흠뻑 보여주며 흥행에 대성공.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그의 영원한 테마를 제시하며 여태까지 통상적인 일본
오락 애니메니션의 개념을 깨버린다.

이처럼 100%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그의 비결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모두가 반대하는) 변화구를 개발해내는 치열한 노력,
그리고 용감하게 새로운 변화구를 꽂을 수 있는 추진력과 용기에 있다.

"일주일에 5초를 O.K시키면 됩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철저한 일
스타일에 관해 스즈키 프로듀서가 예를 든다. 요즘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의 키 애니메이터 37명에게 1주일에 단 5초 분량의 그림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 최고의 퀄리티여야 한다. '이것이 안되면 나를
떠나라'다. 초 단위의 불량 부분도 날림 부분도 용납되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가장 혹독하게 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올해 60세의
그는 지난 20년간 밤샘작업을 하고 낮에 잠깐 집에 가서 눈 붙이는
생활을 계속하며 살고있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중노동인지라 그의
오른손등엔 수지침이 전체에 달라붙어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영화의
노예'라고 부른 것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대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지브리 프로덕션. 작화,
미술, 촬영, CG, 연출, 제작의 정예인원만 100명이 넘는다. 특히 일년에
5명씩밖에 늘이지 않는 애니메이터들은 미야자키 감독 및에서 혹독한
실전을 거친다.

이곳에 들어온 신인들은 최고 명인들에게 아낌없이 지도를 받고
애니메이션에 관한한 세계최고 작품들에 참여하며 실전을 거듭한다.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지부리 군단'의 무서운 아이들이 세계
애니메이션 업계를 주름잡을 문화권력집단을 이룰 것은 불을 보듯
빤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중적 파워는 전 매스컴의 대대적인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애니메이션, 영화 담당기자들중에 어린시절 미야자키의
팬이 아니었던 사람은 별로 없다. '붉은 돼지' 개봉때 신문스크랩을
들춰보니 92년 1년간 미야자키를 다룬 신문 박스기사가 무려
117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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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와 '지부리 프로덕션'
'원령공주'관객동원 신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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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교시대부터 만화가를
지망, 학습원대학 경제학부 재학 기간 내내 개인적으로 만화를 공부한다.
졸업 후 토에이동화(東映動畵)에 입사. 이곳에서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5년 연상의 선배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만난다. 훗날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전설이 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에 날개를 달아준 대히트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風の谷のナウシカ:84년)의 프로듀서가 바로
타카하타 이사오.

반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카하타가 감독을 맡은 '추억은 방울방울'
(おもひでぽろぽろ:91년 일본영화 흥행1위)에선 프로듀서로, '헤이세이
너구리전쟁'(平成狸大合戰ぽんぽこ:94년-일본영화흥행 1위)에선
기획으로 불후의 명작을 낳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인생에 또 하나 결정적
행운은 일본최대출판사중 한 곳인 토쿠마쇼텐(德間書店)의 출자로
스타지오 지부리가 설립된 것.

'사람이 최고의 자산'이라고 주장해온 그는 스탭을 전원 사원화하고
연수제도를 정비하며 인재키우는 일을 무섭게 추진해왔다. 그는 지브리
프로덕션에서 극장용 영화에만 전념하며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86년),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88년)로 대히트를 기록한 뒤 급기야 '마녀의
특급배달'(89년)부터는 연출작마다 일본영화흥행 베스트1을 독점한다.
특히 92년 '붉은 돼지'는 그해 같이 개봉된 스필버그 영화나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를 넘어 그해 일본내 방화·외화 흥행순위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97년 '원령공주'가 일본영화사상 최고 기록을
세움으로써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 의 신으로 등극한다.

(이규형ㆍ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