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은 대부분 붓으로 옮겨 적는 필사의 형태로 전해진다. 딱히 다른
수도 없었겠지만 그 방대한 분량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옮겨 쓴 그
정성이 참 놀랍다. 쓰다 보면 지루한 대목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어떤 부분은 쓰다 말고 뚝 잘라 먹기도 한다. 쓰다가 신이 나면 자기
말을 슬쩍 보태기도 했다. 놀부 심술의 가지 수가 필사본에 따라 적게는
스물 몇 가지에서 많게는 70여 가지에 이르는 출입을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렇게 일부 보태지고 변개된 것을 이본이라 부른다.
하도 이본이 많다 보니 고전소설 연구는 이본 연구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긴 소설을 여러 날에 걸쳐 꼬박 베껴 쓰고 나서 맨 마지막에 붓을
놓을 때 솟구치는 감회가 왜 없었겠는가. 그래서 소설책의 말미에는 으레
몇 줄 필사자의 감회를 적어둔 필사기가 붙어 있다. 이것을 읽다가 혼자
빙그레 웃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이 책 보시는 이들이 남자로 되어 언문책을 등서하였다 하는 것이 혹
우스운 사람으로 알 듯 하나, 내 존당께서 한 질을 등서하라 하시기에
역명치 못하여 우연이 시작한 것이 자연 일 질이 되니 내가 생각하여도
실없는 사람이로다."

벽초 홍명희의 집안에 전해온「현시양웅쌍린기」끝에 적힌 필사기이다.
어머니의 명으로 소설책을 베껴 쓰기는 했지만, 남자가 일없이 소설책
나부랑이나 베꼈다는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멋적었던 모양이다.
실없다고는 했으나, 그 방대한 소설을 마침내 다 베껴 여러 책으로
성책하여 노모 앞에 내밀었을 때 환하게 밝아왔을 어머니의 표정이 눈에
보일 듯 선하다. 그 바로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의 글씨로 "이 책
이야기는 한때 심심파적 하기에 좋으니 보시는 이는 즉즉
환송하시옵소서"라고 적혀 있다. 이후 집안에서 읽고 다른 사람에게
대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의 지나온 내력까지 훤히 떠오른다.

"병오년 이월에 여아 조실이 제 아우 혼인 때 근행하여 임경업젼을
등출차로 시작하였다가 필서 못하고 시댁으로 가기에 제 아우 시켜
필서하며 제 종남매 제 숙질 글씨 간간이 쓰고 노부도 아픈 중 간신이
삼사장 등서하였으니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필사본「임경업전」의 뒤에 적힌 필사기이다. 당시는 소설책이 중요한
혼수 품목 중 하나였다. 아우의 혼인을 만나 처음 친정으로 걸음한 딸이
집에 있던 소설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베껴 써서 시댁으로 가져가겠다는
결심을 내비친다. 하지만 그 긴 소설책을 반도 채 쓰지 못했는데
시댁으로 돌아갈 날짜가 닥치고 말았다.

글씨체를 보면, 처음에 아버지는 딸이 반쯤 쓰다만 소설책을 자신이 직접
마저 베끼려 했던 모양이다. 몇 장을 쓰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딸의
사촌동생을 동원하였다. 한 페이지를 써보게 하니 글씨체가 마땅치
않았다. 붓을 빼앗아 다시 두 줄을 적다가 도저히 안되었던지 제 동생을
시켜 마저 쓰게 했다. 필사가 다 끝나갈 무렵 조카 아이가 자기의 필적도
남기겠다고 나섰던 모양이다. 마지막 장의 삐뚤빼뚤한 서툰 글씨 한
페이지는 그래서 끼어 들었다. 그렇게 온 집안이 동원된 필사가 마침내
끝났다. 아버지는 책을 매고 나서 다시 붓을 들어 남은 여백에 편지
대신으로 딸에게 필사의 경과를 적었다.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뒤늦게 친정에서 보내온 이 책을 받아든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때 소설은 그저 단순한 이야기책일 수가
없다. 그리운 아버지, 보고 싶은 동생과 친정 식구들 생각이 날 때마다
그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필사기가 적힌 마지막 장 위에는
그녀의 눈물 자욱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부모의 이런
마음이 딸에게는 그 힘든 시집살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붓으로 베껴 쓴 옛 소설책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참 많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