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한끼 못먹어도 신문 만들어야 한다"…
일제하 민족-언론 이끈 "큰 어른" ##

역사가 가장 오랜 우리 신문의 거대한 뿌리를 일군 거인들의 이야기―.
오늘부터 5회에 걸쳐 연재하는 '조선일보 사장 열전'은 일제하에서
신문을 통해 민족 독립 정신을 건축해갔던 선각자들이 겼었던 영광과
좌절, 눈물과 땀과 피의 기록이다.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방응모
선생 등 오늘의 조선일보를 있게한 대표적 사장 5명을 새롭게 조명한다.
( 편집자주 )


일제하였고, 그는 조선일보 사장이었다. 애손이 배재고를 졸업하게
돼 졸업식장에 갔다가 내빈 대표로 축사를 하게 됐다. 그의 첫마디는
"여러분 조선말 들을 줄 아시우?"였다. 이어 "나는 일본말을 할 줄
몰라 조선말로 하겠오"라고 했다. 그에 앞서 일본말로 사회를 본 교장,
그리고 조선총독과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유창한 일본어로 대독한
조선인 관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언제나 그에겐 유머가
넘쳤지만 그 속에는 섬뜩하리만큼 철저한 민족혼이 숨어 있었다.

조선일보 제 4대 사장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 1924년 9월
13일 75살의 고령으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 그는 '조선 민족
대변기관'이란 기치를 내걸고 민족 신문의 틀을 닦아나갔다. 당시
이상협 최선익 등과 손잡고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독립운동가 신석우로부터
사장 권유를 받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건이 있네. 동아일보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하네. 두
신문이 서로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응하겠네."

그는 신문 지면의 쇄신부터 힘썼다. 그해 11월 23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조석간 6면(석간 4면, 조간 2면)을 발행했으며, 1925년 2월 24일자부터는
그라비어방식(오목판)의 컬러신문시대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연재만화인 '멍텅구리'를 1924년 10월 13일부터 게재하기 시작해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를 채용해 부인란을
확장하기도 했다.

월남은 일제하 민족 진영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큰 어른'이었다. 충남
서천군 출생으로 승지 박정양의 개인비서 수행원으로 10여년간
지내다 우정국 주사, 워싱턴 공사관 서기생,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영참찬, 학부참사관, 법부참사관, 독립협회 부회장, 조선교육협회
회장, 조선 YMCA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인지 일제하 민족언론을 단합시키는 힘도 그만이 발휘할
수 있을 때가 많았다.

1925년 4월 15일 천도교회당에서 열린 제1차 조선기자대회 당시의 삽화
한 토막. 사회를 보기 위해 누가 단상에 올라가기만 하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기자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해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주최측이 이를 말리느라 맞고함을 치니 대회장은 난장판이었다.
늦게 도착한 월남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볼
사람은 월남 밖에 없었다. 그가 단상에 올라간 뒤도 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상재 선생은 고개를 젖힌채 큰 소리로 웃기만 했다. 이 유별난
행동에 장내가 주목하자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 떠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웃음을 참기가 어렵소." 월남의
표정에 서린 무서움을 보고 청중들은 갑자기 소란을 멈췄고,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월남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가장 '악질적으로' 떠들던
이에게 장내 정리를 시키고 회의를 일사천리로 이끌어갔다. 이 자리서
기자들은 대동단결과 언론 권위 신장을 결의, 한국 언론사상 획기적
사건으로 지금도 기록된다.

월남은 조선일보 사장이지만 가난했다. 경영난에 시달릴 때는 월급을
자진 반납했다. 세금을 제때 못내 가산을 전부 강제 차압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성부윤(현 서울시장) 전근식 초청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낀 적이 있었다. 월남은 "경성부윤이 내 재산을
빼앗아가더니, 이제 내 성명까지 집행해 가는구려"하며 껄껄 웃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총독부 당국의 언론탄압으로 경영난에 시달렸고, 때로는
사원들 봉급을 여러 달 못주는 경우도 생겼다. 일부 공무국 사원들이
이를 항의해 동맹파업을 했다. 월남은 '노청년 사장'이란 별명처럼
이렇게 그들을 설득했다. "밥 한 끼 못먹어 죽는 일 없다. 그러나
신문은 하루도 쉬어선 안된다. 어서들 가서 일들 하세." 그렇게 파업은
수습됐다.

그는 무엇보다 민족진영의 화합을 강조했다. 그래서 조선 기자들의
단합과 좌우 민족진영 단합에 힘썼다. 그 결과가 신간회였다.

1927년 2월 15일 300여명이 모인 신간회 창립총회에, 월남은 노환으로
자리에 누워 있어 참석할 수 없었다. 공석중임에도 그는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됐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월남은 회장직을 극구
사양했다. 신석우 조선일보 부사장이 대표로 월남 자택을 방문했다.
"신간회 회장 되시는 것이 그렇게 겁이 나십니까." 월남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그는 신경을 슬쩍 건드렸다. 월남은 역시 예상된 답을 했다.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야. 너무 늙어서 그러는 것 뿐이지.
그렇다면 나가지.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일을
해야지."

월남은 그리고 한달여뒤인 그해 3월 29일 눈을 감았다. 신간회는 이해
7월까지 전국에 134개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수가 3만 7309명에
이르렀으며, 1929년 광주학생사건 이후에는 그 수가 10만명에 육박했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장의위원장은
윤치호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 맡았다. 장례식에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도 무려 20여만명의 조객들이 모여들었다.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은 월남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는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은 동방삭을 앞섰고,
슬플 때는 굴원을 생각하게 한다"며,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말했다.

##임정 이승만 대통령 1925년 신년휘호 1면에 게재##


동포의 절대적 신망을 얻고 있던 이상재가 사장에 취임한 직후인 1925년
을축년. 조선일보는 의욕에 가득찬 새해를 맞았다. 그래서인지 이 해
신년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32면을 발행했다. 하루 보통 4면을
발행하던 시절에 32면이라면 엄청난 분량이다.

신년호 1면에는 이상재 사장의 신년사, 신년논설, 중국 북경대 장몽린
총장의 기고 등과 함께 '철학박사 이승만' 명의의 신년 휘호, '축
조선일보'를 3단 상자로 실었다.

이승만은 당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미국
하와이에 머물면서 1924년 11월 그곳의 대한동지회 종신총재로 추대될
무렵 작성한 휘호를 조선일보에 보내온 것이다. 물론 일제하여서 당시
지면에는 그의 어떤 직위나 직책도 기록되지 못한 채 '철학박사'라고만
소개됐지만 이 휘호는 조선일보에 실린 최초의 '대통령 휘호'였다.

신년호에는 이 휘호와 함께 이승만이 보내온 축하의 글이 '동정!
환영/철학박사 리승만'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재외 모든 동포는
조선일보의 새주(신주-편집자 주·주) 일동에게 대하여 무한한 동정을
표하며 귀 신문이 우리 인민의 언론기관이 된 것을 크게 환영합니다.
우리의 성공은 인민 단합에 있으며 인민의 단합은 사상일치에 달렸나니
신문이 인민의 사상을 인도하기에 유일기관이므로 우리 목적을
속성하기에 또한 유일한 기관이라 합니다."(표기법은 현행 표기법으로
고쳤음-편집자 주·주)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인민의 단합', '사상의 일치' 같은 말 이상을
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그의 휘호와 글을 읽은 독자들의 벅찬 감흥이
어떠했을지를 지금 관점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