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또는, 너는 누구인가.)
인도계 미국 감독 나이트 샤말란은 첫 영화 '식스 센스'에서 관객의
정수박이에 찬물을 들이붓는 반전을 통해 울림 깊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지, 심지어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그걸 알고
살아가기가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식스 센스'가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흥행 성공을 거둔 뒤 그의
두번째 작품 '언브레이커블'(Unbreakableㆍ9일 개봉 예정)은 촬영 기간
내내 기대와 소문이 떠돌았다.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시선과 스릴러
풍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솜씨는 식스 센스와 궤를 같이 하지만 극적인
반전의 힘은 한결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뚜껑을 연 완성작은 촬영 기간 중 흘러나온 이야기 파편들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131명이 죽은 열차 사고에서 한 남자가 살아 남는다.
그에게 골형성 부전이라는 희귀한 병을 가진 흑인 남자가 찾아와,
스스로의 힘을 깨달으라고 재우친다.
살아남은 단 한 사람, 풋볼 경비장 경비원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가
가진 신비한 능력은 무엇인지, 또 그에게 찾아와 쪽지를 남긴
엘리야(새뮤얼 잭슨)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인지, 영화는 섬세하게 직조된
스릴러로, 관객들에게 얽힌 실마리를 풀라고 요구한다. 곳곳에 설치해둔
열쇠들은 줄거리 연결 뿐 아니라 슬쩍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데도 공을
세운다. 사고 직전 데이비드 옆자리 앉았던 풋볼 스카우터 여자가 그에게
"풋볼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의
직업이 풋볼 경기장 경비원으로 밝혀지는 것은 그 조금 뒤이며, 왜 그가
풋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풋볼 경기장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스릴러의
중요한 모티브다.
신비스런 초능력을 믿는 영화답게, 편집과 음향 기술은 관객을 이같은
분위기로 초대해 들인다. '쾅' 소리와 함께 순간 정지 화면이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가 화면을 훑고 갈 때
이야기는 스타일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전작의 흥행 성공이 감독에겐, 특히 샤말란 같은 신인 감독에겐
피할 수 없는 짐이 되는 걸까. 이 영화에서 감독은 전작의 개성을
포기하는 대신 헐리우드 공식에 순응하는 징후를 곳곳에 드러낸다.
데이비드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은 배트맨(또는
슈퍼맨)처럼 자기 얼굴을 가린 채, 범죄에 희생될 뻔 한 여자들을
구하면서 완성된다. 아들(그리고 관객)에게 자신의 초능력과 자기 정체에
대한 확신을 과시하는 데이비드는 분명 전편의 반(反)영웅과 대척점에
선다. 산도를 통과하며 뼈가 다 부러져 태어났던 '유리 인간' 엘리야가
가진 힘과 그에 대한 결말 역시 낯익은 헐리우드 영웅담의 재생이다.
부서져서 태어난 데이비드와 결코 부서지지 않는 엘리야는 선이자
악이며, 결코 슈퍼맨일 수 없는 보통 사람들 안에 자웅동체처럼 함께
깃들인 성정이다. 그러나 샤말란은 두 인물을 선악으로 나누어 놓고,
그곳에 자기 인식의 과제를 던짐으로써 이 영화를 오락 영화와 철학 영화
사이에 엉거주춤 들이밀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