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배달된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굴비낚시」를 읽다가 곰곰
되씹어 보게 만드는 귀절이 있었습니다. 영화「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고 쓴 감상문이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영화는, 「과연 셰익스피어가 아무 경험없이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의문이 의문스럽다. 「정말 경험이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가설을 세웁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 또는
연애에 서툰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그는 매력적인 여자
앞에서, 멋진 시구를 암송하기는 커녕, 매우 수줍은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창작의 에너지는 사랑이기보다는, 이루지 못한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가지 못한 곳,
자신이 해보지 못한 일을 꿈꾸며, 다른 이를 시켜 그것을 달성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청준의 초기 단편집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중에 있는 연작소설 「지배와 해방」이 불현듯 떠올렸습니다.
「언어사회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에서 그는 『왜
쓰는가』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듭니다. 그는 글쓰기의 최초동기,
창작의 원동력을 「복수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작가는 자기실현의
욕망을 좌절시킨 현실세계에 대한 복수심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죠.
이 복수심은 지배의 욕망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바깥의
현실세계가 자신에게 굴복해올 수 밖에 없도록,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질서의 창조와 확대를 꿈꾼다는 것입니다.
김영하의 글이 가벼운 성격의 「영화산문」이라는 점에서, 『왜
쓰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깊히 천착했던 당시의 이청준 글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두 작가는 모두 글쓰기의
원초적인 동기가 작가의 좌절된 욕망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궁핍한 시대가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셰익스피어가
현실의 사랑에서 만족을 느꼈다면 『어째서 그걸 글로 써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작가는 집구석에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쓴다』(김영하)는 거죠. 글쓰기, 넓게는 예술 일반이
현실에 대해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부조화, 또는 불화를
재음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