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읽기가 시의에 맞지 않고 특히 젊은 경향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두 개의 변명을 준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몫의 논리이다. 시대분위기에 맞고 젊은이들의 취향을
살핀 책읽기라면 다른 지면, 다른 매체에서 이미 충분하게 수행되고
있다. 나는 이 지면을 받을 때 그 충분함을 더욱 넘치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건재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통시적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날렵하다 못해 경박하게 보일 만큼 시대의
감각적인 흐름을 뒤쫓고 있는 이 땅의 출판 풍토에서 보면 '열린
책들'의 도스토옙스키 전집 출간은 눈치 없고 미련스러워 오히려
감동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정수를 뽑아 예쁜 단행본으로 정정해 놓아도 이미
컴퓨터시대 젊은이들의 인기품목은 아니다. 그런데 그의 전 작품을 권 당
평균 4백 쪽은 남을 성싶은 책으로 스물 다섯 권을 배짱 좋게 묶어놓고
역자 해설과 권위있는 외국비평까지 곁들여 놓았다.

번역도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일역판이나 영역판의 중역이
아닌 것은 역자들의 낯선 이름과 약력에서 드러난다. 소장 전공학자들로
러시아어 판에서 새롭게 직역한 듯한데 그 때문에 투입됐을 물자와 노력은
어디서 보상받을꼬.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그 스물 다섯 권 중에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고른 것은 문학적인 고려보다는 시대 분위기를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이 작품은 출세작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20년쯤 뒤에 발표된 것으로,
먼 친척으로부터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에 의지해 유폐된 생활을 하고 있는
러시아적 잉여인간의 내면적 독백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윤리적 합리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순수문학의 공격으로 이해된다. 사적인
견해로는 그 비판의 일부가 휘황한 불꽃으로 타오른 게 그의 대작
'악령'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정신적인 배경은 지금과 140년의 시차가 있고,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그것을 발표하고 10년 뒤 그 작품 속의 진술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너무 우울하며 이미 극복된 견해이다. 지금 나는 더 밝고 타협적인
성향으로 쓸 수 있다"라고.

그런데도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오히려 어떤 시의성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를 바닥으로부터 뒤흔들었던 좌파적 사고의
현주소가 이중 잣대를 가진 윤리적 합리주의와 어정쩡한 공리주의, 또는
공상적 차원으로 후퇴한 사회주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어떤 이는 이 작품에 대해 '독자를 지하실의 악취 나는 분위기 속에
삶을 가두고 있으며 실제 삶에 대해서는 완전히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 대한 지식이란 게 무엇이던가. 삶의
아귀다툼에서 격리되어 있고 광기의 혐의까지 받기는 해도 그렇게 홀로
숙성 되어 가는 사유 또한 삶의 실제적 진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진정한
사회적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지하실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번 여름의 여가는 이 무모한 전집에 탕진될 듯하다. 다시 틈이
나면 제1권 '가난한 사람들'부터 제25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3'까지
차례로 읽어나갈 작정이다. 이는 삼십여년 전 문학청년 시절의 감동을 되살려
보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 이런 전집을 만들어낼 마음을
먹은 출판인에게 경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뜻도 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