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앞에 정녕 장사(장사)는 없는가. 세계 바둑계의 양대 「매스터」로 꼽혀온
조훈현(47)-조치훈(44) 두 거장이 비틀거리고 있다. 40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후진들의 맹
추격을 따돌리며 오연히 자신의 아성을 지켜온 두 거장이 새 천년들어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9일 일본 이마바리(금치) 국제호텔 특별대국실서 벌어진 제24기 기성전 도전 7번기
제6국. 중앙 흑 대마의 명맥이 끊기자 조치훈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나직한
목소리로 패국을 선언했다.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옥새를 이양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기성 타이틀 보유자는 일본기원 랭킹에서 공식 1인자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4년간
지켜온 기성을 빼앗아간 2년 아래의 왕리청(왕립성)이 카메라맨들의 집중 플래시 속에
「대관식」을 치르는 동안 조치훈은 쓸쓸히 권좌에서 내려와 사라졌다.
같은 날, 조치훈의 「비극」 한시간 앞서 한국기원 특별 대국실서도 변혁을 예고하는
함포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34기 패왕전 방어전에 임한 조훈현이 23세의 이성재에게
3번기 중 첫 판을 패한 것이다. 내용도 완패에 가까왔다. 통산 타이틀 147개에 20번째
패왕 획득을 눈앞에 둔 「바둑 황제」 조훈현은 온통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조훈현은 17일 이성재와 2국을 둔다. 여기서 이기고 최종 3국마저 따낸다면 물론
패왕위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역전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는 무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KBS 바둑왕 타이틀이 하나 남긴 했지만, 그것은 도전제 아닌 선수권제이고 그나마 이미
1회전서 패해 패자전 부활의 길마저 사라져 버렸다.
조훈현과 조치훈이 이번에 기록한 패배는 그것이 단발성이 아니란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퇴조의 기미가 완연한 가운데 결정타를 맞은 것이다. 조치훈의 경우 지난해 여름
고국 후배 조선진에게 본인방 위를 빼앗겼다. 불과 1년전 이맘때만 해도 서열 1~3위
기전을 석권, 「대3관」을 구가하던 조치훈에게 이제 남은 것은 2위 타이틀 명인 뿐이다.
서열 2위는 유지하고 있지만 흐름은 매우 불안하다.
조훈현의 「새 천년」은 난조의 연속이다. 올들어 8승 6패, 최근 한달여 동안만 보면 1승
5패에 연속 3패를 기록중이다.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 대 위빈(유빈)전, 루이나이웨이(예내위)에게 빼앗긴 국수 방어전에다 이번 이성재에게 당한 패왕 방어전
1국이 그 중심에 있다. 막간에 벌어진 KBS배에선 16세 소녀 박지은 이단에게도 패했으니
40년 기사 생활에서 처음 겪는 난조란 말이 지나치지 않다.
극도의 긴장속에서 싸우는 바둑에서 40대 중반의 나이란 절정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지칠 때도 됐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이들 「양 조」의 권토중래는 쉽지 않으리란
견해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기량이나 정신력 양면에서 이들의 완전 퇴조를 점치기엔 이르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등장한다.
조치훈은 본인방전 도전자 선발 리그서 현재 4승 1패로 선두를 달리며 조선진에의 리턴매치를 예약해 놓고 있다. 조훈현은 제1회 농심배서 지난
달 요다를 잠재움으로써 22일 속개되는 3라운드 대회에 연속 등판한다.
그가 한국 기사중 유일하게 8강에 올라있는 제2회 춘란배도 21일 중국 난징에서 속개될 예정. 「양조」에게 이제 주적(주적)은 상대 기사가 아닌 세월이요, 무기는 기량 아닌 정신력으로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