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1929년 10월8일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서울과 평양이 축구로 우의를
다지는 제1회 경평전의 막을 올렸다. 당시 조선일보 안재홍 부사장은 개막식
축사를 통해 『금번 경기는 다만 경기로써만 축복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두 도시의 친목을 위하여 실로 축복하여 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축구계 최고원로 김화집옹과 축구스타 고종수 선수가 조선일보 창간 80주년을 맞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암동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에서 「경평전」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김진평기자 jpkim@chosun.com*)
조선일보는 창간 80주년을 맞아 국내축구 인기스타 고종수(24·수원 삼성)가
축구계 최고원로 김화집옹(91)을 만나 경평전과 한국 축구의 뿌리를 찾아보는
인터뷰를 기획했다. 김옹은 1929년과 30년에 걸쳐 조선일보가 주최한
「경평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국축구 1세대다. 김옹은 2회대회 때는 경성팀
엔트리에 포함됐고, 33-34년 「경평대항전」(조선체육회 주최)서 선수로
활약했으며 광복후인 46년 3월에 열린 「마지막 경평전」(자유신문사 주최)에서는
주심을 맡았다. ( 편집자 )
-작년 8월 프로축구 올스타전때 선생님의 시축모습을 봤습니다. 여전히
건강하시죠?
『그럼. 오늘도 광명집에서 전철을 타고 광화문 조선일보를 찾아왔지.』
-어릴 때부터 「경평전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축구의 뿌리가 여기서
시작됐다고 하던 데 경평전은 어떤 대회였습니까.
『일제시대인 1929년 조선일보사 주최로 서울과 평양이 축구대결을 벌였지.
당시 서울은 경성이라 불렀어. 그래서 두 도시의 앞글자를 따서 「경평전」이
된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조선일보는 최고 신문사였거든. 가장
큰 신문사가 여는 대회인 만큼 인기도 대단했지. 비록 2회대회로 끝났지만 한해
세차례 경기를 벌인 조선일보사의 「경평전」은 당시 최고의 스포츠행사였어.』
-선생님도 그때 뛰셨나요.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1학년이던 30년 제2회 대회때 13명 엔트리에 포함됐지.
그러나 후보였고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어. 그후 33년에 재개된
경평대항전부터 나갔지. 그리고 46년 해방직후에 열린 경평전에서는 주심을
봤어.』
-경평전이 열리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죠.
『기미년 독립운동이 있은 다음해인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설됐어. 당시
체육계 지도층 인사들은 모두 선각자들이었고, 이분들은 체육을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수단이자, 원동력으로 생각했지. 경평전은 조선축구협회가
만들어진 1933년보다 4년이나 앞서 연거야. 조선일보 역시 축구를 통해 민중을
단합시키고, 청년들에게 민족정기를 함양시키겠다는 목적이었지.』
-대회는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관중은 많았나요.
『29년 제1회 경평전은 휘문고보(현재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위치)에서
열렸는 데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것으로 기억해. 그라운드 주변에 그냥 앉고서고
해서 운동장에 발디딜틈이 없었으니까. 입장료는 30전으로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이었지. 평양팀은 흰색과 청색을 반씩 섞은 유니폼에 흰바지를 입었고,
경성팀은 자주빛 세로줄무늬에 자주빛 바지를 입은 것으로 기억해.』
-그때 축구는 용어나 규칙도 지금과 많이 달랐겠네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소개 해주시죠.
『당시 내 포지션은 라이트윙이었어. 나는 평양광성보통학교-배재고보-보성전문을
거치면서 내내 이 위치를 맡아봤고, 백넘버는 평생 7번을 달았지. 라이트 윙은
어느 팀이나 7번이었거든. 윙은 보통 「날개」라고 불렸지만 「널포」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어. 널포는 폭넓게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야. 헤딩슛은 「두탄」이라고
했지.』
-축구공은 어땠어요.
『당시의 공은 지금보다 훨씬 커 농구공보다 조금 작을 정도였지. 지금은
공무게도 450 이지만 500~600 으로 모양도 동그랗지가 않은 「호박공」이었지.
요즘은 골키퍼가 골킥을 하면 상대진영 중간까지 가지만 당시는 하프라인까지도
보낼 수가 없었어.』
-당시에도 인기스타들이 있었죠. 스타선수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경성팀에서는 이영민 이혜봉, 평양팀에선 김영찬 박의현)등이 공을 잘 찼지.
특히 이영민은 야구와 육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만능 스포츠맨으로
동대문야구장에서 첫 홈런을 날리기도 했지. 당시는 남녀가 유별해 처녀들도
선수사진이나 구해 혼자 좋아하는 거지 내색은 할 수 없었어. 요즘처럼
「오빠부대」라는 거는 상상도 못할 때야.』
-기록에 보면 경평전이 열리면 평양에서는 온 시가가 철시를 하고 경기장에는
기생들이 타고온 인력거가 그득했다던데요. 축구장에 여자관중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서울에는 여자관중이 거의 없었어. 평양은 10분의 1쯤 됐나. 평양의 숭실이나
광성고보가 경기를 하면 숭의여고과 정의여고가 각각 자매학교를 응원했지.
또 평양에는 국내 유일한 기생학교인 「권번」이 있어 기생이 많았는 데 이
기생들은 자신의 얼굴을 알릴 목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축구장을 찾아왔지.』
-일본축구가 부쩍 성장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가
안됐다면서요.
『일본사람들은 축구에 취미나 소질이 없었어. 그때도 야구나 테니스는 열심히
했지만 축구는 별로 였지. 26년부터 시작된 전일본중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숭실-보성고보 등이 우승해 나라잃은 설움을 축구로 풀었지.』
-국가대표팀 경기나 국내 프로축구는 보시나요. 요즘 선수들은 어떻게
평가하세요?
『이동국도 잘하고 안정환도 잘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관심이 많아. 지금 자네가
서는 자리는 내가 전문으로 하던 위치야. 관중석에 ?아서나 TV로 자네 경기를
지켜보면서 패스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 패스하고, 굴려주든지 중거리로
날려줬으면 할 때 꼭 그렇게 하데. 10분의 8쯤은 나하고 생각이 같아. 세트플레이
할때 틈을 잘 뚫는 것은 옛날의 내가 못따라가는 부분이지.』
-「할아버지」께서 너무 칭찬을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골드컵이 있었잖아요. 그 경기들은 보셨어요.
『요즘 우리 선수들은 돈을 더 사랑하지, 나라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캐나다하고 경기때보니 슬라이딩태클이 들어오면 다칠까봐 겁을 내고 몸을 사려.
투신하는 정신이 없더라.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은 대회나, 대표팀의 경기는
나라가 지고 이기는 문제야. 무엇보다 애국심이 첫째야. 물론 선수들도 프로서도
뛰어야 하고, 대표팀 경기도 해야겠지. 하지만 우리보다 기술이 낫고, 체격이
좋은 상대들과는 이임생의 「붕대투혼」같은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이기기가
힘들어.』
-2002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야 할텐데요. 오랜 축구경험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얘기가 아직 안끝났어. 두번째 경기인 코스타리카전때는 2-1로 앞서다가
후반 5분을 남기고 한골을 내주고 비겼지. 내 나중에 허정무감독을 만나서도
얘기하겠지만 지도자라면 축구철학에 철두철미해야 하는 거야. 시작 5분과
마지막 5분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누히 얘기되는 건데. 5분 남은 상태서 이기고
있으면 멤버를 교체하고, 위치를 이동시켜 골을 안내주도록 했어야지.』
-대표팀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때는 선수들이 설렁탕이나 냉면 한그릇 먹고, 전차타고 다니면서 경기를
했어. 물론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그러나 추울 때 해외나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전지훈련을 하는 것은 반대야. 아프리카선수들은 35~40도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야. 더위를 참는 체질은 따라가기 힘들어. 북유럽은
그 반대고. 축구는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대를 만날 지 몰라. 운동하기
좋은 장소나 찾아다니고 해서는 강한 팀이 될 수없어.』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래오래 사시고, 2002년 월드컵서 뛰는
제 모습도 지켜봐 주세요.
『종수에게 하나만 당부할게. 운동선수라면 먼저 자기 몸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야 해. 운동선수에게 몸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과 같은 거야. 항상 소중하게
생각해야해. 또 경기때는 매번 최선을 다하는 성심을 가져야 해. 이 두가지를
항상 명심해. 이런 마음만 있으면 이 경기장에서 멋진 어시스트도 하고, 골도
넣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