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 제목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욱
친숙해진 이 말은 원래 달마라는 인도 출신 한 승려가 중국 불교사에
가져 온 혁명적 변화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연
중국 선불교가 서양에 전해져 과학과 합리성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문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면서 "달마가…"라는 새로운 화두가 만들어졌다.

달마와 선불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때로 신비주의 색채까지 띄게 되는
선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바닷길을 따라 서기 520년 중국 남부에 도착한
직후 달마가 당시 불교의 최대 후원자였던 양 무제와 벌였던 한판 논쟁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설명 :
달마상. 인도 출신 이방인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나는 그 동안 많은 사찰을 만들었고 경전을 번역했으며 스님들을
도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공덕이겠습니까?" "황제께서는 아무런 공덕도
쌓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과 진리와 수행자를 향한 내 헌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럼 부처님은 대체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아무 것도
가르치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도 모르겠습니다."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 듯한 달마의 대답에는 당시 절정에 이르렀던 교학
중심의 중국 불교계에 대한 차가운 비판이 들어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
인도 승려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100~200년이 지나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5세기 초 중국에 도착하여
35종, 348권의 불경을 번역했던 구마라집으로 대표되는 교학의 발전으로 당시
중국 불교인들은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달마는 바로 이런 교학 불교를
향해 총체적인 부정의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문자에 얽매어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들을 뒤로 하고
달마는 홀연히 뗏목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하남성 한복판의 숭산이었다. 중국의 전통적 명산 오악의 하나인
중악 숭산에는 서기 495년 북위 조정이 인도 승려들을 위해 세운 소림사가
있었다. 물설고 낯설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동향 승려들이 머물고 있는
사찰로 찾아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달마는 사찰 경내에서
머물지 않고 뒷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달마의 '9년 면벽 참선' 신화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버스가 하남성 성도 정주를 떠난 지 2시간이 가까워지자 중국 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말끔한 모습의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림사의 길목인
등봉이었다. 다시 30분쯤 더 달리자 좌우로 나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바위산이 나타났다. 오른쪽 높은 봉우리가 태실산, 왼쪽 낮은 봉우리가
소실산이고 소림사는 그 사이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소림사는 선불교보다는 선무술의 본산으로 더욱 유명하다. 등봉을
지나면서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하던 무술학교들은 소림사가 가까워지면서
줄지어 나타났다. 학교마다 수백 명씩 학생들이 무술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사하촌 초입에 서 있는 커다란 승려상도 수행자가 아니라 무술승의
모습이어서 낯설기만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소림사 경내에 들어서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수십 채에
이르는 소림사의 크고 작은 건물 중에서 달마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은 '입설정'이다. 달마가 선종 제2조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
곳이야말로 중국 선불교의 탄생지라고 할 수 있다.

달마동에서 돌아와 이곳에 머물고 있던 달마를 어느 겨울날 한 젊은이가
찾아 왔다. 달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는 눈 내리는 뜰에 서서 밤을
꼬박 새웠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붉은
눈이 내리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랐고 순간 뜰의 눈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했다.

이에 달마의 마음이 움직였다. "너의 마음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하게 해 주마." "찾아보니 없습니다." "내가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입설정 왼쪽 주련에는 이 일화를 담은 '단비구법입설인(팔뚝을 잘라
진리를 구하며 눈 속에 서 있는 사람)'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건물 안에는
앉아 있는 달마의 좌우에 혜가를 비롯한 제자들이 서 있는 조각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청 건륭 황제가 썼다는 '설인심주(눈에 마음의 구슬을
새겨 놓았다)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불교는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차례로 거쳐
혜능(638~713)과 신수(606~706)에 이르러 남북 양종으로 나뉘어지면서 뚜렷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흔히 '남능북수'로 일컬어지는 양자의 차이는 북종이
점진적 수련을 주장하는데 비해 남종은 즉각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양자는 한동안 경쟁을 벌이지만 남종이 압도적 우세를 보이게 되면서 선의
정통성은 남종으로 넘어가고 혜능이 6조의 자리를 차지한다.

소림사 대웅전 왼쪽에 있는 '육조당'은 이런 중국 선불교의 초기 역사를
표현하고 있는 곳이다. 뒷벽에는 달마가 숭산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달마귀서도'가 그려져 있고 그 좌우로 달마부터 혜능까지 조사들의
입상이 놓여져 있었다.

소림사 경내를 이곳 저곳 돌아본 후 다시 정문으로 향했다. 입구 벽에
쓰여진 '선종조정'이란 큰 글씨와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줄지어 서 있는
비석들을 바라보면서 선은 과연 현대문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오랜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언어와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에게
모든 2차적 도구를 버리고 삶과 존재의 본질을 뿌리까지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는 선은 분명 한줄기 광명이다.

그러나 선의 진정한 가치는 '사교입선(: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감)'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버릴 '교'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선'만을
고집할 때 그것은 마치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사회가 포스트
모더니즘에 휩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사상가의 유명한 명제를
패러디한다면 "선 없는 교는 공허하고 교 없는 선은 맹목적"이기 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