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이라는 설날. 오랜만에 고향집으로 달려갈 생각에 가슴
설렌다. 그러나 또 많은 여성들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애들과 남편
뒤치닥꺼리 해 시댁으로 달려가면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음식 차리고 차례 준비하고 상 거두고 다시 밥상 준비하고 치우고….
허리 한번 필 새 없이 명절 노동에 치이다 보면 하루 해가 꼴깍 진다.
친정행은 꿈도 못 꾸는 경우가 많다.
배춘복씨네 가족들이 아빠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활짝 웃고 있다. 배씨는 "아내를 비롯해 가족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보내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요즘 신세대 부부 사이에서는 '명절'과 '제사'가 말다툼꺼리, 혹은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다. 명절날 아내는 친정에, 남편은 시댁으로 각각
나뉘어가는 젊은 부부도 등장할 정도. 그러나 부부가 함께 명절다운
명절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지난 몇년동안 '평등부부상'(여성신문
주최)을 받은 커플들이다.
97년 수상자 이종민씨(회사원ㆍ43)네는 큰 집이지만 아내 남수미씨(40)는
다른 집 맏 며느리처럼 일을 혼자 도맡지 않는다. 동생, 사촌 동생 가족들이
명절 전날 이씨네 집에 모여 다 함께 준비하기 때문이다. 장보기도 같이
하나? "당연합니다." 부엌에서 요리도 하나? "당연하지요." 여자들은 갈비
굽고 떡국 끓이고 나물 무친다. 부엌 일이 손에 안붙은 남자들은 부침개
같이 쉬운 걸 맡는다. 제기를 꺼내 닦고 밤도 친다. "싹 준비해 놓고 다같이
놀러 나갑니다." 볼링도 치고 생맥주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간다. 이씨는
평소에도 청소하고 다림질하는 게 익숙해 명절에도 자연스럽게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다. 86년 결혼하고서 처음에는 '네 역할' '내 역할'을
구분했지만 먼저 온 사람이 빨래 넣고 청소기 돌리고 어린이방 가서 아이
데려오고 하다 보니 이제는 서로 척척 알아서 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99년 수상자 배춘복(44ㆍ상업)-정선애(42ㆍ상업)씨 부부는 설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님댁에 간다. 그러나 꼭 시댁에 먼저 가는 것은 아니다. 친정에
들러 아침 먹고 갈 때도 많다. 차례 대신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시댁에 가서도 정씨는 발 뻗고 잠도 잔다. 그러나 음식 준비를 도맡는 형수에게
미안해서, 적당한 때를 봐서 다른 가족들을 재촉해 일어선다. 배씨는 맞벌이
아내를 열심히 돕다가 "내가 살림은 더 소질이 있는 것 같아서" 몇년 전부터
아예 전담하고 나섰다. 중3짜리 큰 아들 학교 운영위원장도 아빠가 맡고 있다.
평등 명절은 젊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다. 99년 평등 부부
김동엽(72)-이정윤(62)씨는 정말 '콤팩트'하고 평등한 설을 준비한다. 분가한
두 아들 내외가 각각 음식을 나눠 만들어오고 이씨 집에선 떡국만 준비하기로
했다. 설날 아침 두 아들 내외와 함께 아침을 먹고 성당에 다녀온 뒤 친척들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아들 식구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지요." 군 출신 남편 김동엽(75)씨는 다른 집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게 젊어서는 가부장적이었다. "내가 이삿짐 다 싸고 그이는 나중에
주소 보고 찾아오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쉰 넘으면서 화분을 돌보고 청소를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아들도 아버지를 많이 보고 배우는 것 같다"는 이씨는
손자에게도 "여자한테 인기없는 남자가 되지 말라"고 강조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