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신문'에다 시리즈로 '누가 건설을 파괴하는가'를 연재한 게
'역린'을 건드려, 나는 기자로 입사한지 불과 여섯달만에 (1947년 5월)
노동신문사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전체주의의 '지상낙원'들에서 노상
불협화음을 빚으며 살아야 할, 나의 고된 운명의 첫시작이었다.


사진설명 :
일제시대 중국에서 항일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한 김학철씨.

1950년 가을, 나는 견디다 못해 압록강을 북으로 건너버렸다. 하지만

크게 바라고 찾아간 그 '지상낙원'도 역시 마찬가지. 다들 입에다 재갈

하나씩을 물린 상태로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벌써 52년째 이

지긋지긋한 재갈을 뱉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1957년의 대숙청으로 55만2천8백77명의 지성인들이 이른바 '반당-
반사회주의적우파분자'라는 죄명을 들쓰고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갈 때,
나도 영광스럽게 한 축 끼였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부터 '붉디붉은
태양 Mao'에 대한 해묵은 신앙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약진'의
광란으로 사람들이 무더기로(약 3천만명 추정) 굶어죽는데도 아침부터
밤까지 '위대한 Mao 만만세'를 외쳐댈 때, 나는 드디어 개인숭배의
미몽에서 깨어났다. 그리하여 1인독재의 해악을 낱낱이 폭로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마음은 먹었어도 공개총살 당하는 광경이 자꾸 눈에
밟혀 속이 후들후들 떨리기만 했다. 몇번인가 결심을 번복했다.
그러나 끝내는 붓을 들고 말았다.

'20세기의 신화(1350매)'를 탈고한 것은 1965년 3월.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에 터진 '문화대혁명'으로 나는 아닌 밤중에 들이닥친 폭도
(홍위병망나니)들에게 원고와 함께 납치를 당했다. 그 결과 조직적으로
동원된 방청자 1300명이 일사불란하게 '반혁명 타도'를 외쳐대는 가운데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법원에서 알려주지를 않은 까닭에 내
가족들은 자기변호를 하겠다는 피고인의 입을 걸레로 틀어막는 진풍경도
구경을 못하고 말았다. 10년 후 만기출옥은 했으나 '반혁명전과자'라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붉디붉은 태양'이 꺼진 이듬해, 전국의 '우파분자'들이 모두 복권이
됐으나(강제노동 22년 만에), 나만은 '반혁명전과자'였기에 제외가 됐다.
무수한 곡절 끝에 내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1980년 12월, 예순다섯살도
다 저물어갈 무렵이였다. 내게다 10년 징역을 고스란히 벌어다 준 '20세기의
신화' 원고는 '시한폭탄'이란 이유로 계속 압류, 다시 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불허발표'라는 조건부로 반환이 됐다.

그때부터 발표를 할 시기가 무르익어 주기를 끈질기게 기다렸으나
실망스럽게도 언론통제의 고삐는 음성적인 방법으로 점점 더 죄어들기만
했다. 12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기다리다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1996년
12월, 나는 눈 딱 감고 서울에 내다 발표를 해버렸다. 탈고한지 31년하고
또 9개월만이였다. 이 '대역무도'한 행위로 인해 나는 또 한바탕 곤경을
치러야 했다. '공판정에 세우려거든 세워봐라. 이번엔 내 이 입을 틀어막지
못할 테니까. 싹 다 폭로를 해버리겠다.' 그러나 이 사건이 빌미가 돼 나는
지금도 부단히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아마도 '20세기의 신화'의 동티는 다음 천년까지도 나를 따라다니며
계속 애를 먹일 모양이다. (작가·독립운동가·연변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