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한민국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 첫 세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직접 월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조국과 사회 그리고 친구와
가족에게 진 크나큰 빚을 갚아나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북한에 대한 환상은 북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서서히 깨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5월16일 무월광의
밤,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해주에 도착, 아침식사를
위해 한 초대소로 이동하던 길이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의 농촌지대를 관심깊게 지켜 보던 중
이루 말할 수 없이 낡고 남루한 3층 건물이 한 채 눈에
띄었습니다. 어찌보면 공장인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축사인
듯도 한 그 건물이 어쩐지 사람들이 사는 주거건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승용차에 동승했던 북한 공작원에게
에둘러(돌려 말한다는 뜻) 물어 보았습니다.
'저 건물은 공장 같이 보이는데….' 그러나 공작원의 말이,
거기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거기에
초가집이 있었다면 제가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목격한 그 건물은 북한 농민들의 지독한 가난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모두의 것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라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병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공동재산에
대한 무관심과 무성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도착 며칠 후 평양의 주체탑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 정권이 '인민'들에게 어떤 대접을 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주체탑의 입구 계단을 오르자
저쪽에서 관리인인 듯한 남자가 다짜고짜 '야 이 새끼야
어디로 올라와, 내려가지 못해'라는 욕설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규정된 위치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다른 방향에서 계단을 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사 제가 잘못을 범했다고 해도, 그처럼 욕설을 하면서
사람을 막 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저는 북한 내에서도 '조총련에서 왔다'고
위장하고서 시내 관광을 나간 것이었는데, 그 관리원은 '이
분은 조총련에서 온 손님이다'라는 말을 듣고도 전혀 사과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일반 주민들을 대할 때 몸에
배인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던 셈인데, '인민의
낙원'이라는 북한에서 주체탑 관리원도 무슨 벼슬이라고
'인민'위에 군림하면서 대놓고 욕을 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한 장면은 북한에서 평범한 '인민'들이 '당'이나 '독재기관'
그리고 벼슬아치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인권'이나 '민주주의'라고는
개념조차 없던 봉건왕조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그 며칠 뒤 모란초대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초대소 앞
마당을 산보하던 때였습니다.
한 북한 공작원이 그 전해 5월 남한에서 운동권 사람들이
연이어 분신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던 일을 얘기하면서
'그때 그 투쟁은 운동권에서 순번을 정해놓고 대중운동을
적발시키기 위해 사용한 전술이죠'라고 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극구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런 투쟁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를 했지만, 참으로
섬뜩한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도 쓸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상식으로 되어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몇건의 사건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북한 체제가 안고
심각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점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들이었지만, 당시까지도 저는 북한 편향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탓에 눈뜬 장님으로 이 사건들을 그대로
넘겨버리고 마음속의 의문으로만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북한 관련 기사와 정보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좀 더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연이은 탈북행렬과 그들의
증언, 매년 엄청난 수의 인민이 굶어죽어가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저는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은 1차적으로 북한
정권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오도된 신념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를
비판-견제-수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갖고있지 못한
김정일 정권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러, 과거 잘못된
사상을 전파하고 북한 공작지도부와 통신연락을 하며
북한에까지 갔다 온 제가 솔직하게 저의 과거를 털어놓고
국가와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하는 것만이 제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북한 체제의 비인간성과 반역사성을 깨달은 이상, 그
체제 아래서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 빨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다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도 북한체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도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의
비도덕성과 끈질긴 적화 통일전략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더구나 저와 같은 사람들의 해야할 바는 크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또한 제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우리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가없는 사랑을 받으며, 일가친척이나 수많은 지인들,
은사님들로부터도 사회에 기여하는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리라 기대를 받아 왔습니다. 그분들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 사회로부터도 저는 많은 혜택과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은 저에게 삶의 터전일뿐 아니라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것이 곧 제가
잘되는 것이요, 제가 잘 되는 길이 곧 나라가 잘 되는 데 있다는
믿음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저의 행동은 북한 정권의 사상적 사기극에
걸려들어 저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준 우리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커다란 위해를 가하는 것이었으니 저의 과오가
너무도 컸습니다. 이 모든 저의 행동은 북한 정권과
주체사상에 대한 오도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인간애로 그들과 함께 하려 하며, 서로 돕고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려는 모든 사회운동을 우리 사회에 소금과 같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형태이든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그들의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김일성주의'를
지지하는 운동은 국가의 안위에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북한에 경도되어 입북까지 하게 된
것은 미처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접해 볼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대남선전전술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83년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학생운동에 나설 때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하였으나, 재학시절의 이념 학습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행복적으로, 유일의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다시금 86년부터는 북한 정권의 선전에 넘어가 북한
체제가 마치 지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적 발달상으로 보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91년 5월
저의 입북시점까지 계속되었으며, 한번 빠진 도그마의
세계에서 헤어나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밀입북하여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
공작원들로부터 통신연락방법이라든가 무인함 관리방법 등의
교육을 받은 뒤, 91년 5월부터 97년 2월까지 6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전기와 팩스를 이용한 통신연락, 4회에 걸친 해외접선
무인함 관리 등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속된 것은 애초에 생각했던 대승적 해결이 현실화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는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북한에 대한 저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질 수록 좋고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김정일 정권과 협상도 할 수
있고, 햇볕도 쬐어줄 수 있으며, 쌀도 갖다줄 수 있지만, 김정일
정권을 대하는 근본태도만큼은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사회에 복귀한다면 '기업보국'의 정신으로 현재
제가 운영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운영에 매진하겠으며,
이를 훌륭하게 키워 디지털 시대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민족의 문화자산으로 만들어 보고픈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사회에 진 빚을 갚는 첩경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일들은 애초에는 남한의 운동권도 북한에
창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정도로 출발하였으나 실은
북한이 통일에 관심이 없으며 관심이 있다면 오로지
적화통일에 관심있을 뿐이라는 점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94년 정도부터는 서서히 북한 정권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으나 당장의 대북 연락관계는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북한이 운동권 전체에 무차별적인 포섭공작을 벌이는 것을
막고, 그들의 운동권에 대한 영향력을 그나마 최소화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잘 하고 있으니 다른 선을 더
만들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북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고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헛되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97년 3월경
모든 대북 연락관계를 끊게 됩니다. 그후 저는 과거 저의
잘못을 공개하고 과오를 범한 점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며
수사기관에 자수하는 방식으로 저의 과거사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제가 자수하려면 김영환씨도 자수해야 하고
김영환씨가 자수하려면 그의 조직 관련자들도 모두 따라서
자수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97년
가을부터 김영환씨가 중국에 도피해 나가는 바람에
문제해결의 고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98년 8월에는 제가 직접 중국에 나가서 김영환씨를 만나, 저와
그와 그의 조직 관련자들이 모두 함께 나서서 과거의 활동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하고
국가에 은전을 구하여 새 출발하자는 제의도 하였으나,
문제해결의 고리를 쥐고 있는 김영환씨가 귀국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방안이었습니다. 비록 먼길을 에둘러 왔지만 이번에
제가 북한 정권의 본질을 널리 알려 더 이상의 안타까운
분단의 희생자가 발생치 않도록 하는 것도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젊은 학생들이 북한에 대한 오도된
인식으로 저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 황금같은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유린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후 저 개인에 대한 신병처리가 어찌되든 관계없이 저의
생각은 일관될 것이며, 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이 다 함께 국민 앞에 과거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과오에 대해서 사과하고 국가가 이들을 대국적
견지에서 포용하여 국가 사회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엎드려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저의 사건 처리로 고생하신 수사관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999.9.7 조유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