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터너사에서 발간한 20세기의 역사 '우리들의 시대' 책 표지
에는 네 사람 사진이 나온다. 대통령 루즈벨트, 달에 첫발을 디딘
존 그린, 피카소 그림 속의 여인 그리고 마릴린 먼로다. 영화 '나이
애가라'를 시작으로 먼로선풍이 불고 27세의 헤프너는 그를 표지 인
물로 '플레이보이' 창간호를 냈다. 먼로의 누드 사진으로 창간호는
750만부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오랜 역사동안 갇혀있던 성이
우리들시대의 하늘로 솟아오른 또 하나의 인공 위성이었다. (이어녕
이화여대 석좌교수).

빛나는 금발, 장난기 머금은 눈, 영글어 벌어진 꽃봉오리같은 붉
은 입술...

헐리우드는 20세기 섹스의 여신을 창조했다. 1953년 '나이애가라'
가 개봉되자 26살먹은 여배우는 단번에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터질
듯 풍만한 엉덩이를 위태롭게 흔들며 걸어가는 뒷모습은 미국뿐 아
니라 전세계를 휩쓰는 선풍이 됐다.

노마 진 베이커. 평범하기 짝이없는 사생아 소녀는 고아나 다름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가 가진 재산은 단 하나, 하늘이 준 몸
이었다. 의탁할 데 없는 소녀 시절, 한 사이즈 작은 스웨터를 입고
등교했던 그는 자기에게 향한 시선을 만끽한다. 성급했던 첫 결혼을
뒤로하고 그는 헐리우드로 간다. 갈색 머리는 금빛으로 물들이고,
중서부출신 서민 냄새가 나는 이름은두운을 맞춘 극히 여성적인 이
름, 마릴린 먼로로 바꿔버렸다. 그뒤, 머릿글자 MM은 20세기 섹슈얼
리티 산업의 일반 명사가 되었다.

"샤넬 No 5를 입어요." 밤에 무엇을 입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
가 돌려준답이다. 골빈 육체파 금발 미인의 멍청한 대답으로 흔히
여기지만 정말 그것 뿐일까. 영어로는 옷을 입는다와 향수를 바른다
는 표현에 모두 ware를쓴다. '섹스 심벌'로 규정된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한번 더 비틀어 돌려준 날카롭고 씁쓸한 위트다.

마릴린 먼로의 출현은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대중
문화적 기념비가 되었다. 금발의 육체파 미인은 먼로 전에도 후에도
많았지만, 그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성상이 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애초부터 그는 섹스 심벌로 철저하게 만들어져 공급된 기획
상품이었다. 20세기 폭스사가 키워낸 먼로의 이미지는 소녀와 창부
가 섞인 것이었다. 꿈꾸듯 초점이 먼 시선, 부서질듯 불안한 발성,
흔들리는 걸음... 작가 노만 메일러는 마릴린 먼로 전기에서 "먼로
야 말로 어른을 위한 동화 주인공이었다"고 썼다.

2차 대전의 상처에서 벗어나던 세계는 먼로의 천진하며 자연스런
섹스 어필에 매혹된다. 미국서 그는 청교도 최후의 억압 지역인 성
금제를 깨는 장치였고, '7년만의 외출'에서 이웃집 남자가 마릴린
먼로를 통해 얻은 해방감은 실은 관객 모두의 것이었다. 지하철 통
풍구 바람으로 치마가 휘날려 올라갈 때, 관객들 가슴 속에도 한줄
기 바람이 휘감긴다. 먼로로 인해 성은 더이상 엄숙하거나 비밀스런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 나아가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것으로 공인받았다.

바로 뒤를 쫓아 등장, 동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엘비스 프레슬
리와 함께 마릴린 먼로는 20세기의 성적 우상으로 완성된다. 워홀이
실크 스크린으로 복제해낸 색색의 이들 이미지는 이들을 불멸의 신
화적 영웅으로 묘사한다. 비천한 출신과 엄청난 성공, 의혹에 싸인
죽음은 한낱 대중 스타인 이들을 나무랄데 없는 20세기 신화로 각인
한다. 전쟁의 참화로 황폐화된 한국땅에도 이들은 어김없이 상륙했
다. 쥔것 없는 빈 손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이들이 대신 성취해준 성
공 신화에 취하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하면서 아마도 따뜻하고 풍요
로운 다른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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