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한말의 `국제 마담' 외국인 사회 주물렀다 ##.
1996년 초가을 당시 서울대학교 건축과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밟
고 있던 황두진 씨로부터 깨알만한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그는 그 해 여름 60일 동안 유럽 배낭 여행을 하면
서 주로 건축물을 답사했다. 귀국하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한 프랑스
청년을 만났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성도
리(Lee)요 이름은 필리페라했다. 외모는 완벽한 백인인 이 프랑스 청
년은 일본 동경으로 일자리 구하러 가는 중인데 자기 뿌리를 찾고 싶
다면서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해주었던것이다.
주한 외교관들과 환담하고 있는 손탁 여사. 건축 양식으로 미루어 손탁호텔
입구 계단에서 찍은 것 같다. /김은신 지음 '한국 최초 101장면'에서
그의 할아버지는 '리 타이완' 비슷한 이름으로, 한국 황제를 위해
궁성에서 일했으며 프랑스 여인과 결혼해 니스에서 살았는데 상당한
부자였다. 한데 놀음을 좋아해 재산을 탕진했다 한다. 할머니 이름은
에마클레멘츠로 역시 궁중에서 보모로서 황후에게 봉사했다 한다. 그
의 아버지는 페르디난드 리로 용모가 상당히 동양적이었으며 자기는
머리가 검은 것말고는 서양적인 용모라고 했다. 연전에 자기 누이동생
이 한국에 가 할아버지에 관해 수소문했으나 어떤 실마리도 못 찾고
돌아왔고, 황두진 씨도 귀국 후에 프랑스 대사관에 가 수소문했으나
헛수고였다고 했다. 이 이씨 성의 프랑스 청년 뿌리를 찾아달라는 것
이 이 편지 요지였다.
분명히 왕이 아니라 황제라 칭한 것으로 미루어, 고종이 황제로 즉
위한 뒤에 황실에서 주방 일을 본 서양 여인 한 사람이 짚이기는 한
다. 다만 그 여인 이름은 프랑스 청년의 할머니인 에마 클레멘츠가 아
니요 또 프랑스 여인도 아니다. 그 여인은 독일 여인으로 한국의 러시
아 초대 공사로 부임해온 웨베르의 처형이다. 이름은 안토니에트 손탁
(존타크)으로 내한 당시 32세 과부였다.
독일 사람들 이름짓는 걸 보면 퍽 소박하다. 키가 작으면 클라인
(klein),키가 크면 랑(lang), 머리가 검으면 슈바르츠(schwarz), 머리
가 희면 바이스(weiβ), 태어난 철이 여름이면 좀머(sommer), 태어난
날이 일요일이면 존타크(sontag·손탁)이다. 아마도 조상이 일요일날
태어났던지, 손탁은 사교적인 웨베르 부인과 더불어 민 황후를 배알,
진주분을 남용하여 피부가 상한 것을 보고 양화장품을 진상하여 그 뒤
부터 황후로 하여금 양화장품을 쓰게 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비
만 체질의 손탁과 그 프랑스 청년이 연관이 있을 성 싶어 추적해 본
것이다.
한말에 서울에 와 프랑스어 학교 선생을 하면서 손탁과도 가까이
지낸 에밀 마텔이라는 분이 있다. 일제 때 한 신문이 그가 겪은 한말
의 견문을 연재했는데 그 중 손탁 여사에 대한 대목이 바로 그녀와 프
랑스청년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그 신문을 보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계셨을 때 조석 식
사 및 식후 커피와 만단의 수발을 손탁 여사에게 맡겼다 한다. 왜냐하
면 민 황후 시해 직후인 당시 황제는 주변 사람에 대한 극도의 불신
노이로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손탁 여사가 마음에 들어
그후 요리나 연회뿐 아니라 외교-국제 문제에 대한 정보를 듣기도 했
고 국내의 외국인 소식도 손탁을 통해 들었다. 워낙 발이 넓은 여인이
었기 때문이다. 미국 공사-프랑스공사, 그리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미국선교사를 비롯, 민영환-이상재-윤치호-이완용 등이 회원인 정동구
락부의 마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동생인 웨베르 러시아 공사의
부인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 사교의 마돈나였으며 1주일에 한 번씩 정
동 러시아 공사관에 외국인 내외를 초대해 파티를 베풀고 볼룸을 꾸며
무도회를 주최하곤 했다.
이 손님들을 안내하고 소개하는 것이 손탁 몫이었다. 왜냐면 4개
국어에 능통한 국제통이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선교 의사인 에비슨 부
부가 어느 수요일 러시아 공사관의 이 외국인 파티에 초대받아 가자
손탁 여사는 유창한영어로 이렇게 소개했다. '저 키가 작은 동양 사람
은 일본 공사 부부지요.
사귀어보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저기 앉아있는 서양 사람 중에
키가 작아 보이는 이는 웨베르 부인의 남편이지요. 알고보면 호감이
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를 좀 알아듣긴 하지만 부인과는 달리 말도 잘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합니다. 웨베르씨 옆에 앉아있는 분들은 프랑스
부부입니다. 프랑스 공사이지요. 그들도 액센트가 강하다는 흠은 있지
만 영어를 잘 합니다'.
저 한 쪽 풍모가 이색적인 서양인은 누구냐고 물으니까 '한국의 로
마 가톨릭 선교회 회장인 뮤텔 주교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모국인 프랑스에 갔다 온 적이 한 번도 없답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모두가 그렇답니다. 영어는 잘 하지 못합니다만 대부분 무
슨 말인가를 알아차립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의 심성이나 신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손탁이요, 그래서 친화력이 강했고 수다스러웠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웨베르 부인은 이 손탁을 앞세워 서울의 외국인 부인 대모 노릇을
했다. 외국인 가정에 환자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 위로해주고 도
움을 주었으며 가족 생일 잔치도 어찌나 자상하게 기억하던지 술과 과
자를 들고 찾아가길 거르는 일이 없었다. 또한 외국인 집에 초상이 나
면 맨먼저 장례 준비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바로 이 자매였으니 호
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겠다.
고종황제는 손탁이 살고있던 정동 러시아 공사관 입구께 개인 집을
사서 호텔을 지어 손탁에게 주었다. 손탁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임 표
시이기도 하려니와 외국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침략 일본에 시위를
한 것이기도 하다.
400여 평 대지에 회색 벽돌 2층 양옥인데, 2층은 귀빈실로 아래층
은 보통실과 커피숍을 겸한 식당을 두었다. 바로 이 커피숍이 한말 외
국인들을 결집한 사교장이었다. 상하층 창은 아치형으로 하고 창 사이
벽을 작게 하여 모든 벽면을 아케이드 모양으로 구성했다. 이런 건축
양식은 정동의 러시아계통 건물인 러시아 공사관, 덕수궁의 양식 건물
인 돈덕전 중명전과 같은 양식이다.
이 손탁 호텔에서 묵고 간 명사로서 '톰 소여의 모험'으로 우리에
게도 친근한, 미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랄 마크 트웨인을 들 수 있다.
그는 노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와 종군하면서 이 손탁 호텔의 단골 손
님이 됐던 것이다.
그리고 국운이 풍전등화로 깜박일 때 한국에 온 '말괄량이 애리스'
로 알려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따님 앨리스 루스벨트 양
도 이 호텔귀빈실에서 묵었다. 우리나라를 반신불수로 만든 을사조약
을 강제하고자 한국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가 진치고 앉아서 일본 군부
와 한국 조정의 친일파를 조종했던 현장이 바로 손탁 호텔이다. 을사
조약을 성사시키고 그의 참모들과 한국 친일파가 기념 사진을 찍은 현
장도 바로 이 호텔 앞이었다. 고종황제는 이 일본 세력에 대항하는 외
세의 결집 장소로 이 호텔을 지어주었는데 우리나라를 말아먹는 모의
현장이 되고 말았으니 무상하다.
이 호텔은 1918년에 이화학당에 팔려 기숙사로 쓰였는데, 마루 바
닥이 공기 냉방인지라 한국 사람에게 낯설었음직하다. 그래서 당시 신
문에서 이화학당의 기숙사에서 많은 여학생이 냉증을 얻는다고 온통
마루방뿐임을 지탄하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겁없이 밀어닥친 친로 정책을 수용하
는데 전위적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손탁이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 전
초지로 눈독을 들였던 압록강변 용암포-마산포, 그리고 부산포 영도를
조차하거나 기지건축 허가를 내는데 손탁의 숨은 힘이 막대했음은 공
공연한 비밀이 돼있다.
손탁에 대한 앞서 에밀 마텔의 회고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노일전
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한국에 디딜 기반을 상실한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엘에게 엄청난 값에 팔아 큰 돈을 쥐고 남프랑스 니스의
시골에 별장을 짓고 살다 죽었다. 그가 궁에 있을 때 궁중연회에서 심
부름꾼으로 부리던 한 한국 아이를 양자로 삼더니 황제에게 허락을 받
아 벼슬길에 들게 해서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국을 떠
날 때 손탁은 그 양자를 데리고 프랑스에 갔는데 후에 한국에 왔다갔
다 한것으로 알고 있다' 했다.
노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배경을 잃은 손탁은 그 호텔을 프랑
스 사람에게 좋은 값으로 팔고 양자로 삼았던 이씨 성 소년을 데리고
한국을 떠났는데, 떠날 때 고종이 3만환이라는 거금을 전별금으로 내
리고 은잔을 하사했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했다.
이 손탁이 양자로 데려간 소년이 이씨 성이요, 니스에 가서 프랑스
여인인 에마 클레멘츠와 결혼시켜 페르디난드 리를 낳았고 페르디난드
는 한국에서 자기 조상을 찾아달라는 필리페 리를 낳은 것일 게다. 이
편지를 받고 손탁의 양자인 이태원씨의 혈족을 신문에 수소문했으나
응답이 없었고 뿌리없는 프랑스 이씨가 유럽에 번져나갈 판이니 역사
의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