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인형의 집' 노라의 가출이 유럽의 여권의식에 불을 당겼다면
한국 여권의식은 화가 나혜석의 이혼이 성냥불을 그었다 할수 있다.당
시 모던 걸이라 하여 양장에 단발을 한 여인이 없지 않았지만 남성우
위 사회에의 이혼 저항은 용기있고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강
오륜에 억눌리고 양반에 억눌리고 남성에 억눌리고 조상에 억눌리고
남편에 억눌려 온, 그래서 그저 숨만 쉬고 살아왔던 한국 여성의 인간
선언이다. 이로부터 외형적인 신여성만이 아닌 내실있는 신여성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


사진설명 :
남편 김우영과 파리 여행에 나선 나혜석. 당시 유행 첨단을 보여주는 모자와
모피 코트 차림이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

행한씨에게도 비탄, 절망이 불소할 것입니다.".

1934년 8, 9월호. 월간 잡지 '삼천리'에는 우리 역사상 전무 후무
한 '이혼 고백서'가 두달에 걸쳐 실렸다. 화가 나혜석의 공개적 '이혼
고백서'. 당대의 명사였던 변호사 김우영과 11년 결혼 생활을 이혼으
로 마친 나혜석은 이 글 내내 체념과 회한, 고통으로 가득찬 심경을
드러냈다.당시 서른 여덟이었던 나혜석은 1929년 파리에서 최린(전 천
도교 교령)과 벌였던 연애 행각이 뒤늦게 국내에 알려지면서 1931년
이혼을'당했'던 판이다.

소생 4남매는 모두 남편에게 남겨두고 빈 몸으로 쫓겨난 그는 화려
했던 시절을 뒤로한 채 신문 잡지에 글 쓰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이
혼 고백서'에 이어 그는 최린을 상대로 낸 보상비 청구 소송, "당신과
의 연애로 이혼을 당했으니 나를 책임지라"는 재판 청구로 또한번 세
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나혜석의 결혼과 이혼, 최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세기
자유 연애 풍조가 시작될 시대의 풍경화다. 개화기에 태어난 신여성은
1920년대 이후 '모단 껄'(modern girls)로 한걸음 더 내디뎠다. 서구
풍물을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인 이들은 여성을 속박하는 유교적 인습
과 도덕률을 벗어버리자고 외쳤다. 신식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은 주
로 글쓰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촉구했고, '스스로 선택한' 자유 연애
로 여성적 자아를 확인하려 들었다.

18세에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한 나혜석은 이광수 등과 친교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는 '이상적인 부인'같은 글을 유학생 동인
지에 발표해 유명해진다. 스물 다섯에 한국여성으로는 처음 유화 개인
전을 가진 그는 조기침후(모닝) 커피를 즐기는 멋쟁이였다.

이들 신여성의 자유 연애는 그러나 시대와 불화한다. 아니, 차라리,
정면충돌한다. 당대의 최고 작가 김동인은 소설 '김연실전'에서 이들
엘리트 신여성의 자유 연애 지상주의를 통렬히 비웃었고, 촉망받던 작
가 김일엽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뒤로 하고 수덕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유 연애란 이름 아래 지식인 남성들
과 스캔들을 일으켰고, 작가적 재능보단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세를 타
기도했다.

"에미를 원망치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는 유명
한 고별기를 남긴 나혜석. 이혼 후 육신과 정신에 깃든 병으로 끝내
남루한 행려병자로 폭풍과 불꽃의 삶을 마친다. 당대의 지배 이념, 유
교의 삼강오륜을 거부했던 선각 여성에게 내려진 엄혹한 벌이었다.'자
유연애'로 대표되는 일제하 신여성들의 개인적 엘리트주의가 시대와부딪힌 한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