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개정 ##.
1962년 9월23일부터 30일까지 전국 도청소재지에서 헌법개정에 대한
공청회가 있었다. 10월31일에 헌법개정안 완성, 이어서 최고회의(국회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결. 12월17일에는 국민투표, 약 79%의 찬성. 새
헌법은 12월26일에 공포되었다. 4년 중임의 대통령중심제와 국회단원제,
강력한 정당정치를 골자로 하는 이 헌법내용에 대해서는 비민주적이란
시비가 없었다. 이 헌법개정 과정은 역대 헌법개정 역사에서 가장 모범
적인 사례로 꼽힌다. 1980년대에 직선제로의 개헌을 주장하던 김대중
총재도 '간단하게 말하면 제3공화국 헌법으로의 복귀를 요구한다'고 할
정도였다.
◇개정헌법에 서병하는 박정희의장. 오른쪽은 개헌실무책임자 이석제
헌법조문의 축조심의에 참여했던 최고위원 김윤근(5·16때의 김포
해병여단장)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의 '단임'과 '4년 중임'을 놓고 격론
이 오갔다는 것이다. 한 위원은 "현직 대통령이 출마하면 공무원과 경
찰이 과잉충성하게 되어 있다"면서 "임기를 연장하더라도 중임은 막아
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3공화국 헌법에 '중대한 실수'가 하나 있었
다. 과거 헌법에는 대통령과 장관 등이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
을 위반했을 때의 탄핵소추 의결 조건을 '국회의원 50인 이상 발의에
재적의원 3분의2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2 찬성'으로 엄격하게 규정했었
다.개정헌법은 이를 '30인 이상의 발의에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대통령과 장관들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하여 탄핵심판위원회(위원장
대법원장)로 넘길 수 있고 의결을 받은 자는 탄핵결정이 날 때까지 그
권한행사가 정지되도록 했던것이다.
만약 야당이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 여당 출신 대통령을 쉽
게 탄핵의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 의장은 개정헌법이 공포된
다음에 이 조항을 발견하고 화를 냈으나 떠나간 버스를 향해 손흔들기
였다. 이 조항은 1969년에 3선 개헌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할 때 '대
통령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50인 이상의 발의와 재적의원 3분의2 이상
찬성으로 탄핵소추를 발의할 수 있다'로 개정되었다.
개정헌법 제4조는 신설된 것인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
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란 내용이다. 전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
행함을 사명으로 한다'(제6조)로 되어 있었다. 즉, 해외에 파병할 때는
국군의 설치목적과 위배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박정희는 당시 월남파
병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헌법개정의 실무책임자 이석제 법사위
원장이 찾아와서 문제를 제기했다.
"각하, 6·25 때 유엔의 16개국이 군대를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었는
데 반대 상황에서 우리도 군대를 해외에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평화를 위해서 파병이 가능하도록 조문을 만들었습니다.".
박정희는 이 조항에 대해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생각할 시
간을 좀 주시오"라고 했다. 몇 시간을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던 박정희
는 이석제를 불러들여 "해외파병이 가능하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그 3년 뒤 우리 국회가 월남파병을 의결할 때 '헌법위반'
논쟁을 피할 수 있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또 국회의원 후보는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출마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무소속 출마를 봉쇄했다. 국회의원은 임기
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정당이 해산될 때는 의원직
을 상실하도록 규정했다. 정당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962년 12월6일을 기해 계엄령이 해제되고 17일의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된 후 20일부터는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의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12월23일 워커힐 준공식에 참석했던 최고회의 위원
들은 한국관에서 가칭 재건당의 비밀창당 작업을 지휘해온 이영근 정보
부 차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당총재를 중심으로 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기 위
해서 사무당원 우위의 이원제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주체 위주의 군인출신 정당이라는 평을 안 듣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에 때묻지 않은 덕망 있는 인사를 선택해서
당을 조직했습니다."
"파벌이 없는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 자천타천의 정치지망생은 한 사
람도 입당시키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혁명주체에게는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이라는 길
을 열어 놓았습니다.".
비밀창당작업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쌓여 있던 많은 최고위원들이 들
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무국 당원들이 국회의원을 통제하겠다는 거야?"
"모든 일을 김종필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야, 뭐야?"
"우리들 보고 김종필의 시녀 노릇을 하라는 이야기지?".
이런 말들이 오고가면서 축하연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동면하던
정치가 민정이양의 계절을 만나서 깨어나기 시작하던 시점에 주체세력
내부는 금이 가고 있었다.
문제의 재건동지회 조직은 박정희 - 김종필 - 이영근 - 강성원(현재
71세·한국종축개량협회 회장) 라인에서 주도했다. 김종필 부장은 정책
연구실 행정관 강성원 소령에게 일을 맡기면서 창당작업의 바람막이를
해줄 사람으로서 육사8기 동기인 이영근 정보부 차장을 지명하여 사무
총장으로 내보냈다. 강성원은 정치활동이 금지된 기간에 혁명주체세력
이 사전조직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논리를 내놓았다.
"정치활동이 재개되면 아마추어들인 우리는 구정치인들에게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전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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